내일시론

최악 산불에 음모론 진영싸움이라니

2025-03-31 13:00:22 게재

영남지역의 동시다발 초대형 산불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재난으로 기록될 것 같다. 이번 산불로 30명이 숨지고 9명이 크게 다치는 등 모두 75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밝혔다. 현재까지 피해 면적은 서울의 80%인 4만8000여헥타르에 달한다. 국가유산 주택 공장 같은 시설물 5000여곳이 불에 탔다.

대형산불은 이상기후로 말미암아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뉴노멀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캐나다 스페인 호주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최근 산불재앙을 겪었다.

대형 산불 재난에 음모론 퍼뜨리고 진영싸움 벌이는 볼썽사나운 광경

재난은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재난은 인간의 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재난극복을 돕는 온정의 손길이 각계각층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기 그지없다. 구호 자원봉사와 더불어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만 수백억원에 이른다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런 정겨운 소식과 달리 음모론을 퍼뜨리고 진영싸움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광경도 적지 않아 안타깝다.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단순한 실화(失火)가 아니라 고의성이 짙다는 근거없는 주장이 만연한다. 여기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한 시점에 발생한 산불이어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편견이 담겼다.

지난주 말 울산에서 열린 대규모 윤석열 탄핵반대 집회에서 보수 인플루언서인 전한길 한국사 강사는 영남지역 산불에 간첩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전 씨는 앞서 TV조선 유튜브에 출연해 “우리나라에 간첩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불 지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탄핵반대 집회를 주최한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도 대형산불에 북한이나 간첩의 개입 가능성을 언급했다. “짧은 시간 안에 30군데가 넘는 산불이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은, 이거는 자연발화로 됐다고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집회에는 국민의힘 국회의원들도 참석했다.

윤석열 탄핵반대와 극우 발언을 자주 하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큰 산불이 나면 대공과 형사들이 가장 먼저 투입돼 대공용의점 수사에 나섰다. 불순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된다’라고 거들었다. 하나같이 국가적 재난에 정치적 음모론을 덧씌운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유튜버에도 음모론적 가짜뉴스가 여럿 올라왔다. 대표적인 보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간첩들이 조직적으로 산불을 일으키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이는 국가를 교란하려는 전형적인 비대칭 전술’이라는 취지의 글이 반향을 낳았다. ‘갑자기 하루만에 산불이 이렇게 증가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누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국가 세력의 테러’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음모론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은 경찰조사 결과에서 이미 드러났다. 의성 산불은 성묘객의 실화, 산청 산불은 농장을 운영하는 주민의 예초기 작업 도중의 실화로 밝혀졌다. 울산·울주 산불은 농막 용접작업 도중의 실화, 김해 산불은 쓰레기 소각 중 실화라고 장본인들이 고백했다.

음모론이 전례없이 득세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극단적 갈등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음을 방증한다. 재난 상황에서마저 정치적 태도에 따라 공감과 반대 의견이 결정되는 일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전례없는 음모론 득세, 한국사회 극단적 갈등이 위험수위라는 방증

진영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27일 산불 피해 지역인 경북 의성 안동 영양 등지를 방문했을 때 몇몇 피해 주민의 항의 장면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후 재난지역 지원 의사를 철회했다는 반응이 진보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잇달아 보였다. ‘기부를 취소했다’ ‘저런 반응엔 더이상 도울 수 없다’는 글이 다수 떴다. ‘이재명 대표가 중국과 의도적으로 산불 방화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가짜뉴스가 뜨기도 했다. 그러자 민주당이 가짜뉴스를 유포한 혐의로 16명을 고발했다.

참사 수습을 책임져야 할 정치권은 재난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 연일 입씨름했다. 국민의힘은 야당이 예비비를 대폭 삭감해 재난 상황 대응 예산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여당의 거짓말 선동’이라고 반박했다. 치명적인 재난상황 앞에서 꼴불견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경종을 울렸다. “힘든 시기에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재난에 굴복하지 않고, 함께 일어서야 한다.”

김학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