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전쟁 청사진 ‘미란 보고서’
“구조적인 강달러가 미 제조업 부진 원인” 주장 … 달러 약세 이끌 '마러라고 합의' 나오나
‘슈퍼 관세데이’(미국 현지시간 4월 2일)를 앞두고 시장의 불안감이 최고조로 치솟은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 밑그림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미란 보고서’가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일을 ‘무역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선포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고관세 정책을 공식화했다. 트럼프는 “미국이 수십년간 착취당했다”며 “이제는 돈(Money)과 존중(Respect)을 되찾을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돈과 존중’을 어떻게 되찾을지에 대한 트럼프2기 경제정책을 이해하는 기본 교본이 바로 미란 보고서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 스티븐 미란 허드슨베이캐피털 전략담당자가 쓴 41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이후 미란이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에 기용되는 계기가 됐다. 미란 보고서의 관점에서 보면 동맹을 향해 “미국을 벗겨 먹고 있다”고 비판하며 세계 각국을 상대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전략적 행보다.
보고서는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 외에 외국 중앙은행에 달러 이용료를 내게 한다거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거론한다. 미란의 생각은 스콧 베센트 미 재무부 장관이 제시하는 ‘3,3,3 경제전략’에도 반영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41페이지 분량의 이 논문은 트럼프 2기 관세 정책과 세계경제 질서 재편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청사진”으로 볼 만하다고 평했다.
트럼프2기 세계경제 질서 재편의 밑그림
미란 보고서가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세가지다.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고,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며, 동시에 기축통화국 및 패권국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은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기축통화가 된 달러에 대한 수요 때문이다.
미란 위원장은 미국이 주요 국가에 자국 통화의 가치를 높이도록 압박하고 달러 가치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세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즉 외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통화가치 조정에 순순히 합의할 가능성이 낮은 만큼 관세를 통해 선택을 압박하자는 것이다.
미란은 준비자산(기축통화) 과부족이 21세기 국제통화체제의 근본모순(트리핀 딜레마)이라고 지적한다. 준비자산 수요가 달러로 집중돼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그 부작용이 미국경제를 옥죄고 있다는 것. 미란은 날로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달러약세를 동시에 달성해야 미국 제조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트리핀 딜레마 벗어나기
미란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미 행정부는 교역조건, 통화가치, 국제경제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중에 중국산 제품에 관세 60%, 그 외 국가에 1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으며 무역정책과 안보를 연계시켰다. 달러는 지속적으로 고평가되어 미국 제조업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트럼프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높이 평가하고 (무역에서) 달러 사용을 중단하는 국가를 제재하겠다고 경고해 왔다. 미국이 다른 국가의 준비자산(reserve asset)인 달러 공급 비용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른 나라의 총수요를 미국으로 재배치(대미투자 증대를 의미함)하도록 하고(중략) 무역정책과 안보정책을 긴밀히 연계시켜 준비자산인 달러 공급과 안보 지원을 한묶음으로 하여 부담을 나누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2000~2011년 사이 중국과의 무역 증가로 미국 제조업 일자리가 약 200만개 없어졌다.(중략)중국의 공격적인 사이버 스파이 활동은 미국의 경제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FBI는 2023년 9월에만 중국이 미국 영국 프랑스 루마니아 등의 26만개 인터넷 장비를 해킹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항만에 사용되는 중국제 화물 크레인에 ‘비밀원격장치’가 내장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산 제품을 무조건 수입하는 것은 경제적 군사적 리스크를 동반한다.
환율변동과 관세부과로 미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수입품의 가격은 거의 변하지 않고, 중국 등 수출국이 관세 부담을 떠안아 중국 소비자의 실질구매력은 감소했다. 2018~2019년 중국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실효관세율은 17.9%로 증가했는데 중국 위안화는 달러 대비 13.7% 절하돼 중국 수입품 가격은 4.1% 상승했다. 중국은 경쟁력 있는 제품을 미국에 직접 수출하고 경쟁력을 잃은 제품은 우회수출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50% 증가해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중국 등 각국 정부가 보유한 미국채도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외국 정부에 지불해야 하는 이자가 천문학적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재 워싱턴DC 정치권에선 외국 정부에 지급하는 이자를 줄이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현재 보유 중인 국채를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으로 교체하자는 아이디어가 거론되고 있다.
다만 외국 정부 입장에선 국고로 매입한 미국채에서 발생하는 안정적인 이자 수익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모든 국가에 대해 관세를 올린 뒤 외국 정부가 미국 국채를 무이자 채권으로 교환할 경우에만 관세를 완화하는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이다.
미란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의 위상과 안보 리더십을 활용해 동맹국에 부담을 공동으로 지우면 세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글로벌 딜’로 ‘마러라고 협정’을 제안했다.
100년물 국채 동맹국에 강매 아이디어
예컨대 세계 각국은 준비자산으로 미국채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데 대부분 만기가 10년 이하다. 이를 100년 만기 국채나 만기가 없는 영구채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초장기 국채는 거의 무이자로 발행하는 게 핵심이다. 동맹국이 영구채 등을 무이자로 매입한다면 미국은 이자 부담 없이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기업이 무상으로 자본 투자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각국 중앙은행이 일정 수준의 무역대금을 초과하는 달러를 매각하고 자국 통화를 매입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하면 달러 약세를 유도할 수 있다.
이런 협정은 트리핀 딜레마에 몰린 미국이 세계 금융 시스템의 원칙을 바꾸는 행위란 점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1년 금태환 중지와 ‘제2의 플라자 합의’에 비견된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독일 일본 등의 통화를 절상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했다.
중국 경제학자 로기원 (Lu QiYuon)은 미란 보고서에 대해 “지금의 미국 국가부채 는 36.4조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국가부채와 기업과 개인의 부채는 모두 260조달러에 달한다.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며 “미국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국가는 연 GDP 15조달러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데 그런 나라는 중국뿐이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의 40%를 점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중경쟁 대비한 중국의 대응
중국에 대해 달러로 무역 결제를 하라는 미국의 압력도 우회하고 있다. 중국인민은행은 2025년 3월 17일부터 아세안 10개국 및 중동 6개국과 무역대금을 디지털 위안(digital RMB)으로 결제하는 시스템 운용을 공식적으로 개시했는데 결제 규모는 세계 무역액의 38%에 달한다. 원유와 LNG 매매 금액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결제시스템인 스위프트(SWIFT)를 우회할 수 있게 됐다.
SWIFT을 이용한 결제에는 3~5영업일이 소요되지만 디지털 RMB 결제에는 7~8초가 소요되고, 결제 비용 98%가 절약된다. 국제결제은행(BIS)도 이 결제 시스템을 획기적인 혁신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싱가포르 외교장관과 유엔안보리의장을 역임한 마부바니 교수는 지금처럼 세계 질서가 급변하는 시대는 지난 500년 이래 처음이라면서 아세안 국가들은 상황 변화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고 국익을 따져 냉정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 했다. 어떤 강대국도 자국의 국익을 희생하여 우방국에 동정을 베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호관세 정책과 중국경제의 성장에 따라 일자리가 없어지는 나라는 동남아 국가뿐 아닐 것이다. 트럼프가 한국 재벌 오너에게 미국 투자를 요구하는 모습과 2025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미국 2.2%보다 한참 뒤지는 1.6%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한국은행의 전망을 보면 마부바니의 조언은 우리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