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장 지도를 다시 그린다 ⑤ 화남공업지역(華南工業地域)

광둥성에 가면 5년 후 중국의 미래가 보인다

2014-02-10 11:26:01 게재

GDP '1조달러 클럽' 진입한 첫번째 성(省) … 2014년 한국 따라잡고 세계16위 오를듯

지난 1월 4년 만에 다시 찾은 화남지방의 중심 광둥성(廣東省) 성도 광저우(廣州)는 또 다른 도시로 거듭나 이었다.

광저우 바이윈(白雲) 국제공항은 시설이나 모든 면에서 현대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고 승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시내로 가는 도로 주변에 높이 자란 가로수는 깨끗했고, 꽃도 피어 있었다. 중국 전역을 괴롭히는 미세먼지 농도도 높지 않았다. 광저우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자 2010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중국 제 1의 상업도시이다. 2010년 아세안게임을 계기로 도시 전체가 업그레이드된 '스마트시티'로 거듭나고 있다.

광둥성은 중국 발전의 견인차이자 세계의 공장에서 구조조정을 통한 '질적 성장'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광둥성이 견지해온 '질적 성장'의 성패 여부는 시진핑 시대 중국 경제의 미래와도 관련이 있다.

경제특구 특허권 시(習)씨 가문 소유 = 2012년 12월 8일 시진핑은 공산당 총서기 선출 직후 광둥성 선전시 롄화산(蓮花山)에 위치한 덩샤오핑 동상을 찾아 헌화한 후 첫 시찰지로 남순강화 장소였던 광둥성 선전과 주하이(珠海)를 방문해 개혁 추진 의지를 천명했다.

<2012년 12월 8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광둥성 선전시 롄화산에 위치한 덩샤오핑 동상을 찾아 헌화했다. 사진 신화망>

광둥성에는 시진핑 부친 시중쉰(習仲勛)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중쉰은 16년 만에 복권돼 1978년 4월 광둥성 당위원회 서기에 부임해 1인자가 되었다. 시중쉰은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수만명의 주민들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경제특구를 기획하고 설계해 중앙에 건의했다. 경제특구는 구상은 1930년대 중반 그가 이끈 산시성(陝西省 섬서성)과 간쑤성(甘肅省 감숙성) 변경 '정치해방구'에서 따온 것이다. 2010년 기자가 선전을 방문했을 때 한 공원에 전시된 사진 설명에는 "1979년 4월 덩샤오핑은 시중쉰이 제출한 홍콩 마카오 부근 선전, 주하이, 산터우(汕頭) 수출 가공단지 건설에 관한 의견에 찬성을 표시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해 7월 중국 정부는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 푸젠성(福建省)의 샤먼(廈門)에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당시 시중쉰은 홍콩과 마카오의 화교자본가들을 접촉해 막대한 자금을 선전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시중쉰은 3년만인 1981년 베이징으로 복귀해 승승장구했다. 은퇴 후 1990년부터 2002년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선전에서 생활하는 등 경제특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광둥성 '산업 및 노동력 이전' 전략도>

중국의 개혁개방은 광둥성에서 출발했으며, 2단계 새로운 고조기도 광둥성에서 시작됐다.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이 후퇴할 조짐을 보이자 덩샤오핑이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선전을 찾아 승부수를 던졌다. 1992년 1월 18~2월 22일까지 우한(武漢),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시찰하고 남순강화를 발표했다.

시진핑은 아버지가 정무를 주관하던 2년여 동안 자주 광저우에 내려와 부모를 만났고, 주장(珠江)삼각주와 하이난도 등을 둘러보았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선전시 당서기로 시중쉰을 극진히 모신 장가오리(張高麗)는 시진핑 집권 후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시중쉰을 광둥성 당서기에 추천한 예젠잉(葉劍英)과 그의 후예들은 시중쉰이 은퇴한 뒤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시진핑 집권 후 군을 장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둥성 아시아 '4마리 용' 모두 추월 =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 때 선전에서 "광둥이 힘을 다해 20년 동안 아시아의 '4마리 용'을 따라잡으라"고 독려했다. 지난 2009년 4월 광둥성은 경제개발 청사진인 '주장삼각주지역 개혁발전 계획안'을 발표하고 당시 경제규모 기준 세계 13위인 한국의 GDP를 2020년까지 따라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 한국을 추월할 전망이다. 덩샤오핑의 꿈이 22년 만에 실현되는 것이다. 싱샤오웨이(幸曉維) 광둥성 통계국장은 지난달 15일 광둥성 정치협상회의(정협) 제11기 2차 회의에 참석해 광둥성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2012년에 비해 8.5% 증가한 6조2300억 위안으로 잠정 집계됐으며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돌파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광둥성의 GDP가 1998년 싱가포르, 2003년 홍콩, 2007년 타이완을 각각 추월했다면서 올해 한국을 넘어서면 아시아 4룡을 모두 제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에 세계 GDP순위 15위를 기록한 한국의 1조13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규모다. 광둥성이 단일 국가로 보면 세계 16위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갖추게 됐다. 한국의 지난해 성장률은 2.8%, 올해는 3.8%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광둥성의 올해 성장률이 8.5%대를 기록할 경우는 한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광둥성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 관리들을 만날 때는 이구동성으로 "광둥성 인구가 한국보다 두 배가량 많기 때문에 1인당 GDP는 한국에 뒤처지며, 아직도 노동집약형 산업이 중심인데 반해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업도 많아 서로 차이가 많이 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중산대학 교수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이미 한국은 안중에 없고 지향점은 멀리 앞서 나아가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중국 화남공업지역(푸젠성[福建省]·광둥성[廣東省]·하이난성[海南省]·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최대 과제 = 광둥성이 발표한 2014년 주요업무 계획보고에 등장한 키워드는 '전환'(轉型) '개혁' '민생' '생태'(生態) 등이다. 광둥성은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광둥성의 지난해 성장률이 8%를 웃돈 고성장을 이룬 원인은 '질적 성장' 정책이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광둥성은 지속적인 산업 고도화 정책으로 서비스업 생산액이 2차 산업 생산액을 추월했다.

광둥성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지난해 소비·투자·수출의 경제 기여도가 2007년 각각 45.5%, 22.8%, 31.7%에서 지난해에는 54.4%, 43.7%, 1.9%로 소비 기여도가 10%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세계의 공장에서 시장으로 변모해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 수출이 아닌 내수시장이 오늘의 광둥을 만들고 있다. GDP '1조 달러 클럽' 진입의 일등 공신은 바로 소비였다. '광둥에서 돈 자랑하지 마라'는 이야기는 주재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가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세계 명차 전시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광둥성은 지역 내 산업과 우수노동력 이전(雙轉移)도 왕성하게 추진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한 지역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광둥서 동·서·북부지역으로 이전시키고 광둥성 동·서·북부지역 우수한 노동력을 해당지역이나 주장삼각주 지역의 2, 3차 산업으로 이전시키고 있다.

광둥성, 홍콩 마카오 통합 가속도 = 지난해 상하이 자유무역시범지구가 정식 개설된 이후 각급 지방정부마다 앞 다투어 자유무역시범지구를 개설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중 광둥성은 이미 국무원의 동의를 얻어 관련부처와 공동연구를 마치고 의견수렴 단계에 있다. 위기감을 느낀 홍콩과 마카오가 적극 나서면서 광둥성은 상하이에 이어 가장 먼저 자유무역시범지구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

양창수 총영사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에 다양한 고기가 많이 잡힌다"며 "성격이 다른 광둥성과 홍콩 마카오가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되면 보다 많은 사업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김기수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