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가요무대 대신 태국-한국무대로 3가지 사업 불꽃"
'활주로' 보컬 출신 백 인 준 KOA 사장
바람 속에 향긋한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초저녁 바람은 달고 시원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카오야이 국립공원의 원시림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카오야이 국립공원의 아늑한 산자락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골프코스 18홀이 들어 앉아 있었다. 태국 방콕에서 동북쪽으로 100㎞ 떨어진 나콘나욕에 위치한 로얄힐스 골프장이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클럽하우스 뒤 쪽에서 신나는 록밴드의 연주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영장 가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전자기타와 드럼, 색소폰으로 구성된 3인조 록밴드가 경쾌한 가락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넓은 뜰에는 야외 만찬장이 마련돼 있었다. 양고기와 닭갈비 바비큐, 삽겹살 등을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번졌다. 손님들이 20여 가지 각종 요리와 함께 맥주를 한잔하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그림 같은 전원에서 맛있는 음식과 신나는 생음악을 즐기는 환상적인 밤이었다.
록밴드 보컬의 노래와 기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록과 발라드, 트로트, 댄스 등 모든 장르의 노래들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완벽한 프로였다. 발라드곡인 '찻잔' '빗물' 등에서부터 록 음악인 '할아버지와 수박', 디스코댄스곡인 '한동안 뜸했었지', 트로트 '봄날은 간다', 팝 발라드 '카사블랑카'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매끈하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 사람은 바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항공대 출신들의 록밴드 '활주로'의 보컬로서 활동을 하던 백인준씨였다. 활주로 11기 멤버였던 백씨는 기타의 양윤주, 베이스기타 양해진, 드럼 김종구, 키보드 임용혁 등과 함께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불꽃'이라는 노래로 출전해 입상했다. 그해 8월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는 '살풀이'라는 노래로 참가했다. 본선에 올라가는 데 그쳤지만 '살풀이'는 두툼한 마니아층을 만들었던 노래다.
그나저나 1980년대 중반 가요계를 떠났던 그가 무슨 일로 태국 골프장의 가든파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50대 중반의 나이에 외국까지 나와서 밤무대라도 뛰고 있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태국에서 전자업체와 골프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다. 백 사장의 본업은 전자제조업이다. 방콕 동쪽 방파콩 공단에 있는 KOA는 전화기와 수화기, 전자계측기 등을 조립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연간 40억여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골프장 운영은 겨울 한철 계절사업으로 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골프를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려는 한국의 고객들을 겨냥한 사업이다. 백 사장은 12월에서 2월 사이 로얄힐스를 통해 15억여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4년 전부터는 한국에서 막걸리 유통 사업을 시작했다. 봄과 가을에는 한국으로 건너와 막걸리 유통 사업을 챙긴다. 한국과 태국을 안방에서 건넌방 오가듯 하면서 3개 사업장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가요계를 떠난다고 좋아하는 음악마저 등져야 하는 건 아니다. 8년 전 쯤 백 사장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한국인 동포들과 함께 '방콕 K밴드'를 결성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친목모임이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로얄힐스 고객들을 위한 특별 서비스의 일환으로 그들 앞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2시간여 동안 흥겨운 가든파티를 마친 뒤 백 사장과 함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는 매년 3개월씩만 이곳 로얄힐스의 사장입니다. 한국의 겨울철인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로얄힐스를 통째로 임대를 해서 운영을 하거든요. 골프코스와 클럽하우스는 물론 골프장 내 호텔과 펜션, 식당, 종업원 등을 같이 빌리는 거지요. 로얄힐스 골프장을 감싸고 있는 카오야이 국립공원은 세계 5대 자연생태 보존지역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우리 골프장은 거대한 원시림이 쏟아내는 녹색 바람과 향기를 접할 수 있는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 백 사장과 함께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그가 처음 태국 생활을 시작한 아유타야를 둘러볼 참이었다. 방콕 북쪽 64㎞ 지점에 있는 아유타야는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이던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남하를 하다가 정착을 한 곳이다. 북쪽 라오스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차오프라야강이 아유타야의 황성옛터를 휘감으면서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아유타야는 유서 깊은 역사도시일 뿐 아니라 로잔나, 하이텍, 사하랏, 방파인, 팩토리랜드 등 모두 5개의 공단을 품고 있는 산업도시였다. 차가 멈춰선 곳은 로잔나 공단 안에 있는 대형 공장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백 사장이 한동안 물끄러미 공장 건물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때 전자완구로 유명했던 삼근물산이 있던 자리입니다. 태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1989년 삼근물산이 처음 태국으로 진출할 때 공장 개설 요원으로 이곳에 왔어요."
삼근물산은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경주용 자동차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조이콤', 전자 작동 완구인 에이스텍, 휴대용 가라오케 등을 개발하면서 전자완구 업계를 선도하던 회사였다. 백 사장이 처음 아유타야에 왔을 때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그는 개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회사 이름을 'Korean of Ayutthaya'로 지었다. 아유타야에 정착을 한 첫 한국인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가요계는 숱한 별들이 명멸하는 무대다. 무대를 떠난 스타들은 또 어딘가에서 다른 생업에 종사한다. 백 사장은 1985년 가요계를 떠났다. 가수활동에 대한 회의가 커지던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아직 학업조차 마치지 못한 막내딸을 걱정하시면서 눈을 감으셨다. 백 사장은 1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생활인으로 돌려 세웠다. 가수 생활을 계속하면서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불안정한 가수 생활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기로 했다. 백 사장은 완구업체의 선두주자였던 삼근물산에 입사를 했다. 삼근물산 본사는 서울 중구 서소문에 있었다. 그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본사 구매 관리부였다. 서울 본사에서 1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부천에 있는 공장으로 배치를 받는다. 그 즈음은 거센 민주화 물결과 함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삼근물산은 노동자들의 가파른 임금인상 요구와 노사분규를 피해 공장을 태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아유타야였다.
삼근물산이 로잔나 공단에 입주한 첫 번째 업체였다. 그러나 1993년 12월 삼근물산은 무리한 신제품 개발과 해외공장 이전 등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도산을 하게 된다. 백 사장은 아유타야에 온지 4년 여 만에 공장개설 요원에서 본사 부도에 따른 공장정리 요원으로 임무가 바뀌게 된다. 한때 대한민국 완구업계를 주름잡던 삼근물산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라도 완구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싶었다. 삼근물산을 정리하고 남은 금형을 인수받았다. 1994년 2월 KOA를 설립했다. 삼근물산에서 생산하던 15종의 완구 생산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때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본격적인 부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값싼 중국산 완구들이 세계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격 경쟁력이나 물량에서 중국제품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1999년 9월 아유타야의 KOA 공장 문을 완전히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금융위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고 대량해고를 당한 직장인들은 길바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국이 더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당시 제 수중엔 맥주 3캔을 살 정도의 돈 밖에 없었습니다. 그걸로 맥주를 사왔어요. 아내랑 마시면서 의논을 했지요. 죽으나 사나 태국에서 승부를 걸어보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더 이상 아유타이의 널찍한 2층 단독 집에서 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두 아들의 유치원 앞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이것저것 돈이 될 만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삼각대와 안전봉 등 건설현장에서 사용하는 안전용구들을 한국에서 수입해서 팔아보고, 멕시코에서 무역을 하는 지인에게 태국산 의류를 보내는 사업도 해봤다. 골프장 역시 그때 손을 대기 시작한 여러 가지 사업들 중 하나였다.
방콕에서 남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방파콩 공단. 백 사장의 첫 사업체였던 KOA가 입주했던 아유타야에서는 120㎞ 이상 떨어진 곳이다. 백 사장이 안내한 곳은 방파콩 공단 안에 있는 아담한 공장이었다. 단층짜리 깔끔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작업복에 푸른 색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40여 명의 직원들이 작업대 앞에서 전자인두와 전동공구 등을 들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재래식 전화기와 수화기를 생산하는 백 사장의 KOA 공장이었다.
"우리 공장은 모두 납땜과 LCD(액정표시장치), 전화기 등 3개 작업라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전화기 내 수신 마이크와 스피커 간 컨넥터를 장착하는 작업라인, 수화기 조립 라인, 그리고 전화기 완제품 조립 라인으로 구분됩니다. 월 1만 대 정도의 전화기와 10만 대의 수화기를 만들어 냅니다."
아유타야 로잔나 공단에서 문을 닫았던 KOA가 어떻게 방파콩 공단에서 다시 살아난 것일까. 전자완구를 만들던 KOA가 지금은 어떻게 전화기를 만들고 있는 걸까. 한때 망했던 KOA를 되살린 건 한 마디로 신용이었다. 태국사회에서 꾸준히 쌓아온 백 사장의 신용이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한 것이었다.
아유타야에서 KOA의 문을 닫은 뒤 잡화무역을 시작한 백 사장이 손을 댔던 아이템 중 하나는 전화기 핵심부품 중 하나인 초소형 마이크로폰이었다. 한국의 보성전자(현 BSE)라는 업체로부터 초소형 마이크로폰을 수입해 태국시장에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보성전자는 초소형 마이크로폰 부문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기업이었다. 백 사장이 태국 내 보성전자 에이전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때 대부분 물량을 현 에릭슨LG인 LG스리타이로 납품했어요. 전화기와 전자교환기를 생산하는 업체입니다. 그런데 LG스리타이에서 이따금 긴급 SOS가 왔습니다. 초소형 마이크로폰 재고 물량이 달랑달랑 한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제가 직접 한국으로 비행기타고 날아가서 물건을 공수해 오고는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펑크 한 번 내지 않고 납품을 해 주었지요."
자신의 몸을 던지다시피 성심성의껏 일을 하는 백 사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LG스리타이의 공장장이었다. 어느 날 공장장이 백 사장에게 수화기 조립 하청을 맡아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공장장이 한동안 백 사장을 지켜본 뒤 충분히 신뢰를 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태국에서 백 사장을 넘어설 만한 전자제품 제조 전문가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백 사장에겐 공장을 다시 차릴 자금이 없었다. 신용 하나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LG스리타이에서 계측기와 생산 테이블 등 시설의 일부를 지원해 주었다. 보성전자에서는 외상으로 초소형 마이크로폰을 공급해 주었다. 삼근물산 때 쓰던 납땜인두와 전동 드라이버 등을 창고에서 꺼내 먼지를 털었다. 마침내 KOA 공장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화기 조립 작업만 하다가 나중에는 전화기를 통째로 조립하는 일을 맡았다. 백 사장의 신용이 죽었던 KOA를 되살린 것이었다.
활주로11기 보컬이었던 백인준 사장은 일찌감치 가요무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무대인 태국과 한국을 누비며 살고 있다. 그동안 개척한 전자제조업과 골프장 사업, 막걸리 유통업은 가요무대 못지않게 긴장과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무대다. 활주로 시절 그가 불렀던 '불꽃'의 노랫말처럼 '쉬지를 않고 타오르는 화려한 불꽃'이 삶의 무대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영원히 영원히 불타거라. 쉬지를 않고 타오르는 화려한 불꽃처럼, 우리들의 사랑도 영원히 영원히 불타거라." 백인준은 여전히 뜨거운 삶을 노래하는 불꽃같은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