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중국으로 한국젊은이 이끄는 글로벌진출 전문가"

2015-11-19 12:52:26 게재

상하이 동화대학교 우수근 교수

중국의 경제수도인 상하이는 거대한 마천루의 숲이었다. 121층짜리 상하이타워(632m)와 101층 상하이세계금융센터(SWFC, 492m), 88층 진마오타워(421m) 등 첨단 비즈니스 빌딩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인구 2500여만 명에 면적 6300여㎢의 거대도시 상하이는 중국대륙에서 피어난 화려한 자본주의의 꽃이었다. 중국은 우리나라 규모의 성 22개와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행정구로 이루어진 대국이다. 한반도 43배 크기의 중국대륙 곳곳에 상하이 버금가는 대도시들이 들어서 있다. 게다가 14억 인구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장 때문에 전 세계 기업과 투자자들은 '차이나 드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중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발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기회 땅이다.

우수근 동화대학교 국제문화교류대학 교수는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인 중국이야말로 대한민국 청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땅이라고 설파한다. 스스로 글로벌 진출 전문가를 자임하는 그는 우리 정부의 국비지원 해외 취업 프로그램을 담당하면서 2000여 명에 달하는 한국 젊은이들을 중국에 취업시키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 교수가 자신이 진행하는 수업인 '동북아 개론' 시간에 한국인 유학생들과 잠시 포즈를 취했다.


"중국은 지금 한국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K-팝 뿐 아니라 한국산 제품과 음식 등에 폭 빠져 있어요. 중국기업들도 한국의 인재를 선호할 정도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중국에 진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의 청년과 기업, 창업 희망자들에게 '세계의 미래'인 중국으로 진출하라고 목청을 높여온 인물이 있다. 상하이 소재의 국립 명문 동화대학교 국제문화교류대학의 우수근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05년부터 9년 동안 상하이에서 우리 정부의 국비지원 해외 취업 프로그램을 총괄하면서 2000여 명에 달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취업 및 창업을 도와주는 업무를 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우수근 중국연구소'를 설립해 중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기업들에게 자문을 해주고, 중국에서 취업이나 창업을 하려는 우리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광역시 국제자문관과 강원도 투자유치 자문관 등 우리나라 지자체들의 중국 진출을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자칭 '글로벌진출전문가'라고 자부하는 그는 중국은 지금 전 세계 기업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곳이며, 그런 만큼 다국적 기업에 취업할 기회도 많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상하이는 거대한 마천루의 숲이다. 121층짜리 상하이타워(632m)와 101층 상하이세계금융센터(SWFC, 492m), 88층 진마오타워(421m) 등 첨단 비즈니스 빌딩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상하이 한 복판인 옌안시루에 있는 동화대학을 찾았다. 1951년에 개교를 한 동화대학은 학생 2만6000여 명에 교직원 4000명을 둔 큰 학교다. 옌안시루와 송장 등 두 개의 캠퍼스로 나뉘어져 있다. 우 교수가 근무하는 국제문화교류대학은 옌안시루 캠퍼스에 속해 있다. 예안시루 캠퍼스엔 무역과 경영, 의류패션 등을 전공하는 학생 8000명 정도가 공부를 하고 있다.

국제문화교류대학은 3층짜리 납작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마침 수업을 하고 있는 우 교수의 교실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오후3시 반부터 5시 10분까지 이어지는 3학점짜리 과목 '한중일의 비교(COMPARISON AMONG KOREA, CHINA, JAPAN)' 시간이었다. 동북아 3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비교하는 과목이다. 국제문화교류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교실 안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학생 30여명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미국과 독일, 스웨덴 등 선진국에서 온 친구들에서부터 리투아니아와 카자흐스탄, 터키, 이란, 예멘, 짐바브웨, 우간다, 세네갈, 태국, 인도네시아, 베네수엘라, 칠레, 멕시코 등 오대양 육대주 출신들이었다. 우 교수가 유창한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모두 서로 다른 고유의 문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중국 한자의 경우 10만여 개나 되고, 상용한자만 따져도 6000자가 넘습니다. 일본의 가나 문자는 히라가나 46자와 가타카나 46자 등 모두 92자로 구성돼 있습니다. 히라가나는 일본고유어를 표기하는 데 쓰고, 가타카나는 외래어와 의태어, 의성어를 표현하는 데 씁니다. 그에 비해 한글은 자음 14개, 모음 10개 등 모두 24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우수근 중국연구소'는 건물 2층에 아담한 방 세 칸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 칸은 우 교수의 연구실이었고, 나머지 두 칸은 연구원 3명의 사무공간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우 교수와 그의 연구실에서 차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가 자신의 저서인 '우수근 교수의 실사구시 중국진출 전략'이라는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중국 진출과 젊은이들의 취업 및 창업, 유학 등을 위한 조언과 정보를 담은 책이다. 중국 대륙에서 꿈을 펼치려고 준비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중국 진출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했다.

"중국 시장은 십중팔구 웃으며 들어갔다가 울며 나오는 곳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중국의 실정을 모른 채 '묻지마 투자'나 '돈키호테식 진출'을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중국 진출을 하기 전에 최소한 나는 중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등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중국에서 취업 혹은 사업을 하겠다며 무턱대고 덤벼드는 한국인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우 교수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힘닿는 대로 돕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노동부 산하 단체인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한국 젊은이들을 위한 중국 취업 연수프로그램을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국비지원으로 6개월간 중국 현지에서 비즈니스 실무연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산업인력공단이 한겨레신문 자회사인 한겨레플러스와 공동으로 '중국취업 비즈니스 실무연수 과정'을 개설했다. 5개월짜리 과정이었다. 우 교수는 2005년 6월부터 중국 연수 과정의 총괄을 맡아 진행했다. 매 기수마다 50명 안팎의 연수생들이 왔다.

"당장 취업을 하고 싶어 하는 연수생들 앞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수 없었어요. 중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터전을 닦아온 한국인 사업가들을 강사로 모셨습니다. 대기업 법인장에서부터 개인 사업가, 금융계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을 통해 중국의 실상을 연수생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2005~2013년 사이 2000명 정도의 연수생들의 실무 연수를 실시했습니다. 이중 65%가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했어요. 올 8월부터는 경기도 경제인연합회와 연계한 중국취업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 교수는 중국기업들은 물론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인 인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중국과 같은 유교문화권 사람들이다. 날로 비중을 더해가는 한국과의 비즈니스 뿐 아니라 중국 내 외국인 고객들과의 거래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든든한 허리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열기 힘든 다국적 기업의 문이 중국에서는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한류열풍 역시 한국인 인재에 대한 호감을 더하고 있다. 한류열풍 덕분에 중국 소비자들은 한국산 제품에 대해 기본적인 호감을 지니고 있다. 똑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도 한국인 직원들을 내세워 판매할 경우 중국인 고객들은 더 큰 신뢰를 보인다는 것이다.

"화장품이나 의류, 액세서리, IT 기업들은 한국인 직원을 선호합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은 유행을 앞서가는 세련된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어요. 한국인 직원들을 앞세우면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인 중국을 바로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중국과의 교역량은 우리나라 전체 무역량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전체 수출량 가운데 대중국 수출이 25%에 달한다. 1992년 한국과 중국 간 수교를 기점으로 숱한 한국인들이 '차이나 드림'을 안고 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중국대륙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성공하는 사람들보다 울고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충분한 사전준비 없이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흔히 '만만디'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특징으로 합니다. 만만디의 나라인 중국에 들어와서 빨리빨리 서두르다가는 빨리빨리 귀국하게 되고 맙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식을 따라야 하고, 중국에서는 중국식을 따라야 하는 거지요. 2010년 1월 우수근 중국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대책없이 중국 문을 두드리는 한국인들을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서였어요. 중국진출을 원하는 한국기업들을 컨설팅해주고, 중국취업을 원하는 한국젊은이들의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지요."

중국의 명문중 하나인 동화대학교에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중국을 배우기 위해 몰려든다. 우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인 '한중일의 비교' 시간에는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다.


우 교수는 스스로를 '프로페서' 보다는 '발로페서'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대학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틀어박혀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을 논하기보다는 현장 속에서 답을 찾아내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지구촌을 발로 누빈 발로페서다.

우 교수는 1967년 7월 20일 인천 신흥동 달동네에서 3남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호떡과 튀김, 도너츠 등을 파는 포장마차를 하고, 아버지는 막노동을 전전하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초중고 모두 인천에서 나온 뒤 대학도 인하대 정외과(86학번)에 입학을 했다. 대학까지는 인천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1995년 대학 졸업과 함께 그는 일본 정부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간다. 세계를 누비는 발로페서로서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제가 일본 유학을 시작했을 즈음은 세계무역기구(WTO) 다자무역체제가 개막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국제법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논문도 동북아 안보 문제를 주제로 할 정도로 국제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게이오대학원에 입학해서도 국제법을 공부했습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역시 게이오대학에서 국제법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그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한창 미국에서 뜨기 시작한 로스쿨 바람이었다. 법학 전공자로서 미국의 로스쿨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2002년 6월 게이오대학 박사 논문을 남겨 둔 상태에서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사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을 벗어나서 머리도 식힐 겸 박사 논문 자료도 준비할 겸 1년 정도 예정으로 간 것이었어요. 미네소타 주립대학 로스쿨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의 인생항로를 뒤바꾼 중국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겁니다. 당시 미네소타 로스쿨의 외국인 동창들이 40명 정도였어요. 그중 중국인 학생이 8명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더라고요. 특히 짐(JIM)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던 중국인 변호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짐이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한국인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면, 이제 중국도 봐야 한다. 중국도 과거와 다르니 관심을 가져봐라. 그 말에 현혹됐습니다. 어찌 보면 참 철없던 시절의 무모했던 행동이었던 거지요."

2004년 3월 상하이로 건너왔다. 짐이 화동사범대학교 방문학자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그해 9월 화동사범대학에서 다시 박사 공부를 시작했다. 3년 만인 2007년 6월 '동북아의 다자간 안보 협력기구 고찰'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동화대학 국제학부 교수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느 누구 못지않게 폭넓은 세상을 봤다고 자부합니다. 한국의 인하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게이오대학의 석사 및 박사 과정, 미국 미네소타대학 로스쿨의 법학 석사, 중국 화동사범대학의 박사 학위를 했습니다. 한중일 3국과 미국의 관계를 머리와 손, 발 등 온몸으로 공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한국은 흔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 말을 한다. 어떤 이는 한국을 중국과 미국, 일본 등 고래들의 각축 사이에서 등 터질까 걱정을 하는 새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 교수는 한국을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주장을 한다. 고래들 틈새에서 영리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이익을 취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미국 중국을 두루 섭렵한 우 교수야 말로 꾀 많은 돌고래가 아닐까. 우 교수는 지금도 젊은 한국의 돌고래들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거대한 중국 대륙 위에 당신의 푸른 꿈을 설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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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