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다산에게 길을 묻다│인천 부평구 '공공갈등 조정제도' 제9회 다산목민대상 수상

박원순·이재명도 배워간 '공공갈등조정제도'

2018-02-12 10:38:58 게재

전문가 채용, 조례 제정 '시스템으로'

갈등 조정 넘어 '예방' '치유'로 진화

구청 정문에는 두 무리의 주민들이 연일 확성기를 틀어놓고 집회를 이어갔다. 수십장의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구청장 집무실에도 한 무리의 주민들이 들어와 농성을 벌였다. 주민 간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생존을 위해 싸우던 주민들은 어느새 전과자가 될 상황에 놓였다. 2010년 초 인천 부평구의 '십정동 송전선로 이설 갈등' 때 상황이다. 이미 수년간 이어온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부닥치던 시기였다.

부평구는 지난해 6월 23일 각계 전문기관과 함께 '갈등과 치유 포럼'을 개최하고 공공갈등관리 사례를 발표했다. 사진 부평구 제공


그해 7월 취임한 홍미영 구청장은 가장 먼저 민간인 갈등관리 전문가를 십정동 갈등 현장에 투입했다. 현재의 갈등 상황을 법과 행정의 잣대로만 풀면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상처가 깊게 남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과거 빈민운동을 함께 했던 갈등 전문가를 주민들 속에 들여보내 그들과 대화라도 시작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홍 청장의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부평구 주도로 갈등조정협의체를 구성하고 지난한 협의를 이어간 끝에 주민들 간 자발적 '합의조정'을 이끌어냈다. '송전선로를 장기적으로 지중화 한다'는 어쩌면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합의안이었지만 그래도 주민 간 갈등은 해소됐고,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나 불상사가 벌어질 상황은 사라졌다. 행정에 대한 신뢰도 회복됐다. 김미경 부평구 공공갈등조정관은 "당시는 한전과 인천시가 나 몰라라 하고 손을 놓고 있었고, 부평구도 법과 규정을 내세우며 눈을 감고 있었다"며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제3자의 입장에서 주민들을 만나고, 서로의 입장을 들어주고, 또 서로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재개발·재건축 75곳 '시한폭탄' = 십정동 송전선로 갈등은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구도심 지역인 부평구는 75곳에서 동시에 재개발·재건축이 추진되고 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에서 부평구가 선택한 방식은 '공공갈등 관리를 체계화하고 전문화하는 것'이었다. 부평구는 십정동 송전선로 이설 갈등을 해결한 경험을 행정 시스템으로 가져왔다. 2012년 공공갈등조정관 직을 신설해 민간전문가를 공식 채용했다. 2014년에는 인천에서 최초로 '부평구 공공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015년에는 행정조직 안에 공공갈등조정팀을 구성했다. 그해 6월에는 단국대 등 3개 갈등관리 전문기관과 협약도 맺었다. 지난 5일에도 힐링교육 전문기관 두 곳과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현재 부평구는 전문기관 5곳, 수행기관 4곳 등 9곳과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갈등조정 시스템으로 안착 = 부평구는 우선 갈등 사안을 선별해 조정대상 안건으로 상정한다. 이후 각계 전문가와 해당부서 공무원, 주민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회의 진행과 갈등 중재 역할은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공공갈등조정관이 맡는다. 조정관은 심판 역할도 하고, 정신과 의사 역할을 한다. 기준은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상대방의 이야기도 듣도록 한다. 이 과정이 조례로 의무화돼 있다. 이런 과정을 그친다고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갈등이 더욱 확산되거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미 벌어진 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예방하는 것도 필요하다. 산곡노인문화센터 건립과정이 좋은 사례다. 센터를 지을 땅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고, 부지를 마련하더라도 주거밀집지역이어서 공사 과정에서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부평구는 사업추진을 결정한 직후인 2015년 이 사안을 이례적으로 갈등조정 안건으로 상정했다. 아직 갈등이 생긴 것도 아닌데 선제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후 센터 위치와 설계, 공사방식 등 모든 과정을 갈등조정위원회를 통해 주민과 협의했다. 이 때문에 노인문화센터를 짓는데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건립 과정에서 어떤 갈등도 발생하지 않았고, 지난 9일 주민들의 축하 속에 개관했다.

부평구는 최근 갈등의 사후 치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2월 문을 연 '갈등관리힐링센터'가 치유를 위한 첫 걸음이다. 부평구 힐링센터는 최근 권양숙 '아름다운 봉하' 이사장이 노무현재단 관계자들에게 부평구 갈등관리힐링센터 방문을 권유했을 만큼 유명해졌다.

부평구의 갈등관리 사례는 박원순 시장에 의해 서울시로, 이재명 시장에 의해 경기 성남시로 확산됐다. 지금은 전국 곳곳에서 공공갈등을 위한 모범 사례로 전파되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단국대 분쟁해결센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등 여러 기관에서 학술대회나 포럼 등을 통해 사례발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시 서구의회, 안양대 행정학과 등 다양한 기관에서도 현장을 방문해 사례를 살펴보고 갔다.

갈등관리 법적 근거 마련해야 = 현재 갈등관리 제도의 법적 근거는 2007년 참여정부 때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규정'이다. 하지만 이는 중앙정부 중심이어서 급증하고 있는 지역 갈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거나 조정·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올해 1월 국회에서 박주민 의원이 '공공갈등 예방 및 해결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해 법적 체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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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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