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구속 부추기는 대법원예규 폐지해야"
'특별한 사정 없으면 법정구속' 지침
박판규 "법관의 재판독립 침해 우려"
대법원예규가 법정구속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2003년 9월 제정된 '인신구속사무처리에 관한 예규'가 그것이다. 제60조 '피고인에 대해 실형 선고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정에서 피고인을 구속한다'는 조항이 문제다. 대법원예규는 대법관회의를 거쳐 만들어지는데, 단순한 지침과는 달리 법적 효력을 갖는다.
때문에 해당 예규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의 재판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판규 변호사는 28일 "판사들이 지나치게 충실히 대법원 재판예규를 따르고 있어, 기본적으로 법관의 재판권에 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사 땐 구속말고 유죄판결때 하라 = 대법원 측에 따르면 "기존 구속수사후 재판 관행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서 위 예규조항은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 제도 도입에 맞춰 불구속수사·재판 원칙을 확립하고자 1996년 '인신구속처리요령'형식으로 처음 제정됐다"고 밝혔다. 이를 '인신구속사무처리에 관한 예규'가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박 변호사는 "예규가 만들어질 당시는 구속이 일반화 됐던 상황으로, 구속이 남발돼 불구속 수사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많았다"며 "구속영장 단계에서는 구속여부를 엄격히 판단하고, 1심을 거쳐서 실형이 나왔을 경우 법정구속하는 것을 예규에 규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 측이 밝힌 예규 제정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김용원 변호사는 27일 내일신문과의 통화에서 "법관들이 대법원에서 지침을 마련한다고 쪼르르 따른다면 그게 무슨 법률과 양심에 따른 재판이냐"라며 "재판독립 침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예규 제정당시인 1997년 법률신문에 게재된 '새로운 인신구속제도 시행의 의미를 읽고'라는 논문에서 "법정구속이란 원래 마땅히 구속돼 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수사기관의 비호 내지 판단 미숙으로 불구속재판을 받게 된 경우 이를 시정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법관이 처음에 불구속 했다가 나중에 구속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원은 실형선고를 받은 피고인은 도망할 염려가 있다는 잣대로 법정구속을 합리화하고 있지만, 1심에서 실형선고를 받은 피고인은 도망가기는커녕 항소심에서 무죄나 집행유예를 받고자 더욱 열심히 법원에 출석할 수도 있다"며 "법정구속이라는 이상한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법원은 처음에 도망염려가 없다고 하여 피고인을 불구속했다가 나중에 법원 스스로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도망염려를 창출한 다음 피고인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서보학 교수는 "불구속 재판으로 가자는 얘기는 1심 뿐만 아니라 2심의 경우도 적용돼야 한다"며 "2심도 사실심이기 때문에 피고인이 방어준비와 재판준비를 충실히 하려면 불구속 하는게 맞다"고 지적했다.
◆판사 '예규따라 구속결정 안한다' = 법관은 해당 예규가 없어도 실형을 선고하면서 형사소송법에 따라 '주거불명, 증거인멸 우려, 도주 우려'가 있는지를 판단해 불구속 수사와 재판을 받아온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다. 따라서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법관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예규는 불필요해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 교수는 위 예규가 불구속 수사·재판의 원칙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형을 선고하는 재판부가 볼 때 증거인멸이나 도주우려가 있어 구속하는 것은 몰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구속한다고 예규에 규정돼 있는 자체가 불구속 재판의 원칙에 반한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재판예규가 이상하다"며 "균질한 재판을 기본적으로 국민들이나 법원이 원하기 때문에 재판 결론의 편차를 어떻게든 줄이려고 하다 보니 법원행정처가 불필요한 것들까지 예규에 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사소송법 등에 따라 판사의 판단에 따라 구속사유가 인정되면 구속할 수 있어, 예규로 법정구속 사유를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서기호 변호사는 17일 SNS를 통해 "헌법 제12조는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구속되지 않도록 돼 있다"며 "1심 판사가 불구속 피고인을 법정구속할지 여부의 기준을, 법률이 아닌 예규로 규정한 것은 명백히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수도권 한 판사는 "법정구속시 예규를 따르는 것은 전혀 아니다"며 "헌법과 형소법에 따라 법정구속 여부를 판단할 뿐"이라고 밝혔다.
판사들도 따르지 않고 재판독립 침해 우려만 낳는 대법원예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