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철희 여순사건 연구가

"여순사건 가해자는 간도특설부대 출신"

2019-03-27 11:33:00 게재

진상규명 위해 기록과 싸워

올해 6월쯤 논문 발표 예정

당시 희생자 최소 1만5천명

국군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명명됐던 '여순사건' 진상규명의 길이 열렸다. 정확히 71년만이다.

대법원은 지난 21일 1948년 '여순 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들에 대해 첫 재심 재판을 확정했다. 이번 대법원 재심개시 결정은 장경자, 신희중, 이기화 유족 3인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신희중씨와 이기화씨는 고인이 됐다. 장경자씨는 형사재판을 통해 국가의 사과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
 

장씨가 8년 동안 법정에서 싸웠다면 주철희 순천대 여순사건 연구가(사진·55)는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오랜 기간 기록과 싸운 사람이다. 그는 당시 재판기록과 신문기사를 뒤져 여순사건 발생 1년 뒤인 1949년 전남도가 여순사건 희생자 수를 1만1131명으로 발표한 사실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그는 올해 6월쯤 '여순사건과 간도특설대'라는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해선 가해자를 정확히 적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 선임연구원은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 지휘부에 있던 백선엽, 김백일, 송석학,박승훈 등은 간도특설부대 소속"이라고 말한다. 간도특설부대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한 대대급 부대다.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하면서 이들은 국군 지도부가 됐다. 여순사건과 제주 4.3 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그는 "여순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최소한 1만5000명을 넘어선다"고 말한다. 제주 4.3항쟁과 같은 방식으로 기간을 산정해 1948년부터 지리산 구빨치산 활동을 포함하면 희생자는 2만5000명으로 불어난다.

그는 "이번 대법원의 재심결정이 끝이 아닌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수순천 지역사회에 '재심 대책위'를 꾸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여순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15년 이상을 여순사건 연구가로 살았다. 여수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뒤 지금은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여순사건을 자료를 정리해 수편의 논문과 책을 냈다. '불량국민들'은 여순사건을 왜곡한 사례를 모았고, '국군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여순사건이 14연대 반란사건이 아닌 여순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구분한 책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도 이 책을 보고 여순사건을 '여순민중항쟁'이라고 인용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하던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면서 여수와 순천 전역으로 확산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국군은 지역을 탈환한 뒤 반란군에 협조·가담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내란죄로 군사재판에 넘겨 사형을 선고했고, 이 과정에서 도시 대부분이 불태워지고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 대법원에서 여순사건때 사형당한 3명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사형이 형사적으로 불법이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사형시키려면 죄목이 뭐고, 왜 잡아갔고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판결문으로 남아야 한다. 그런데 이 분들을 처형했는데 어떠한 판결문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군법에 의해 처형했다. 이 자체가 위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 당시 즉결처분을 당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분들은 어떻게 되나.

군법회의에 재판을 받으신 분들 재심 신청이 이번이었고 즉결처분 되신 분들도 이미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불법적으로 국가에 의해 학살됐다고 진실을 규명해줬다. 이 분들도 재심신청을 하게 되면 형사소송 가능하다고 본다. 즉결처분 되신 분 중에 아직까지 재심신청한 분이 없다.

■ 진실화해위는 당시 재판을 통해 사형당한 사람이 756명이라고 발표했다. 

군법회의가 정확히 몇차례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내가 신문상으로 찾은 기록은 광주에서 2번,  순천에서 4번, 여수에서 4번 모두 10차례로 나오는데 최근 군법회의 문서들을 발굴했는데 군법회의 제17호까지 나온다. 군법회의가 17번 열렸다는 뜻이다. 이번에 재심신청한 사람들은 제3호에 붙은 명단에 나온 사람들이다. 명령 1호당 사형을 당한 사람들 명단이 100명 이상이라고 볼 때 군법을 통해 사형당한 사람들 숫자는 최소 2000명이 넘는다. 전남도에서 여순이 발발하고 나서 전남도에서 1949년 10월 25일까지 조사를 했는데 사망자 1만1131명이라고 발표했다.

■ 재심결정 통해 여순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의 이번 재심 결심으로 인해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조만간 재판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 진상규명 차원에서 가장 먼저 밝혀져야 할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여순사건이 반란이었나 항쟁이었나 하는 성격을 명확히 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두번째로 여순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는데 가해자가 누구냐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제주4.3항쟁은 보통 군경과 함께 서북청년당이 가해자라고 규정한다. 여순 가해자는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다. 당시 백선엽 김배길 송석화 박승훈 등 수많은 간도특설대가 여수순천에 내려왔다. 세번째는 개인에 대한 피해에 대해서는 특별법으로 구제할 수 있지만, 여순항쟁 이후 만들어진 지역적 연좌제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전라도는 빨갱이'라는 말은 여순사건에서 비롯됐다. 네번째는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역사의 정의를 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진상규명 과정에서 화해를 너무 주장하면 역사의 정의가 설 수 없다. 역사에는 화해가 없다.

■ 여순사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간도특설대다. 당시 국군 정보국장인 백선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백일은 호남지구 계엄사령관이면서 순천과 여수 탈환작전 제일 선두에 섰던 김백일이나 제3연대 부연대장으로서 여수와 순천 토벌에 앞장섰고 이후 여수 계엄사령관을 한 송석화, 당시 여수 14연대장인 박승훈 등 여순사건에 관여된 주요 인물들이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특히 14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뒤 제주4.3항쟁 때 민간인을 학살한 부대다.

■ 여순사건 희생자 수는 어느 정도인가.

여순 피해를 규정하려면 두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피해기간과 피해 유형이다. 제주4.3항쟁은 기간을 7년 7개월로 잡는다. 특별법에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1일까지 돼 있다. 이 날은 정부가 한라산 입산 금족령을 해제한 날이다.

여순사건도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입산하고 빨치산 활동을 한다. 정부가 지리산 토벌이 끝났다고 선언한 날짜가 1955년 4월 1일이다. 그래서 여순 피해기간을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까지로 산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 등으로 감옥에 간 사람들은 6.25전쟁이 터지면서 전부 학살된다. 이런 사람들까지 전부 희생자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분들까지 넣으면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1만5000명에서 2만5000명까지 된다고 본다.

■ 14연대도 군인들도 희생자에 포함시켜야 되나. 

이 문제는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과 연관돼 있다. 항쟁이라고 본다면 14연대 군인으로 피해를 입으신 분도 넣어야 한다. 당시 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것이다. 이 것은 반란이 아니다. 이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본다면 이들의 피해도 넣어야 한다.

■ 특별법은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하나

여순사건 특별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여순사건 진상규명이고 다른 하나는 명예회복이다. 진실화해위원회법도 마찬가지였는데 명예회복에만 관심을 가졌다. 지금 국회에 제출된 특별법안 5개도 마찬가지다. 진상규명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
홍범택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