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 좌초, ‘적기공급생산’ 위협
2021-07-06 12:04:33 게재
에버기븐호 사태 내막 II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에버기븐호의 사고는 일반적인 경우와 크게 달랐다. 심각한 파문이 예상됐다. 자동차 제조나 슈퍼마켓 유통처럼, 현대 화물선박은 ‘적기공급생산’(JIT)에 의존한다. 필요한 상품이 정확히 도달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구축되는 사업이다. 콘테이너가 널리 확산되지 않은 1970년대, 선박에 짐을 싣고 부리는 데엔 일주일 이상 걸렸다. 하지만 오늘날 1만개 이상 컨테이너를 짊어진 대형 선박들은 정해진 항구에서 단 몇시간 내 짐을 부린다. 정교한 계획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크레인 덕분이다. 창고와 재고를 절약하는 효율적인 모델이면서 동시에 취약한 모델이기도 하다. 공급망에 단 하나의 문제가 생겨도 모든 과정이 멈춰설 수 있다.
수에즈운하 정체가 계속되면 전세계 수백만명의 일상생활이 지장을 받을 위험이 컸다. 공급망 차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 뉴저지 APM터미널에 화물이 예정대로 도착하지 않으면, 수입 상품을 기다리는 미국 기업들에게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짐을 비운 컨테이너를 수출용으로 다시 써야 하는 미국 기업들이나, 해당 선박을 이용해 상품을 날라야 하는 중국, 말레이시아의 공장들도 곤란스런 상황에 직면한다.
AP묄러-머스크 자회사 APM터미널은 비상경영팀을 소집해 시나리오별 다양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수에즈운하가 24시간, 3일, 2주일 폐쇄될 경우를 상정해 항구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따졌다. APM터미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케이스 스벤젠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일은 한계상황에 몰릴 때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며 “2주간의 폐쇄는 전세계 무역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비상경영팀은 결론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일주일 이하라면 벅차기는 해도 관리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이 첫번째 공식 발언을 내놓은 건 사고 발생 24시간 뒤였다. SCA는 성명서에서 “에버기븐호가 악천후로 통제력을 잃었다”고 밝혔다. 용선기업인 에버그린의 경영진은 강력한 돌풍이 원인으로 보인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반면 지역의 한 해운 에이전트는 정전을 지목했다. 3월 24일(현지시각) 밤 전자제품과 시멘트, 식수, 수백만배럴의 석유, 수천두의 가축 등을 싣고 수에즈운하 통과를 기다리는 185척의 선박이 인근에 발이 묶였다. 한 해운관련 전문지는 하루 당 100억달러 가치의 무역품이 정체되고 있다고 추산했다.
유럽에서 도움의 손길이 오고 있었다. 네덜란드 해운 대기업 ‘로열 보스칼리스 웨스트민스터 NV’의 SMIT 인양팀이었다. 에버기븐호를 빌려준 일본 선사 ‘쇼에이기센’에서 고용한 것이다. 해난구조자들은 공해상에서 연중무휴 서비스를 제공한다. 유람선이 침몰하거나 유조선이 불탈 때 구조선원들은 현장으로 달려가 사람과 화물, 장비를 구한다. 구조팀은 헬리콥터 고출력 예인선 등 모든 종류의 이동체를 동원한다. 해난구조사업은 수익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구조대상의 물품 가치 1%를 받는다. 잘하면 수천만달러를 벌 수도 있다. 물론 실패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3월 25일 현장에 도착한 SMIT인양팀은 에버기븐호를 살핀 뒤 선상에서 SCA 소속 모하메드 엘사예드 핫사닌 선장과 선원들을 만났다. SMIT 팀의 임무는 인양이 아니라 조언이었다. 수에즈운하 내 구조작업은 SCA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전문가들은 대안을 제시했다. 견인이 효과가 없으면 배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SMIT팀은 에버기븐호의 갑판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큰 크레인을 갖췄다. 시간당 5개의 컨테이너를 옮길 수 있었다. 1만톤은 줄여야 했다. 크레인이 도착하려면 여러날이 걸린다. SMIT팀에게 필요한 건 작업선이 수로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허가증이었다.
엘사예드 선장은 “옮긴 컨테이너를 어디에 두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SMIT 한 간부는 일단 작은 보트에 실은 뒤 수마일 떨어진 호수로 옮길 것이라도 답했다. 거기엔 또 다른 크레인이 설치돼 해당 컨테이너를 또 다른 보트에 실을 것이었다. 엘사예드는 ‘최소 석달은 걸릴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 SMIT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며 설득했다. 결국 엘사예드는 ‘크레인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모래와 흙, 돌을 준설하고 배를 견인한다. 그때까지 배가 미동도 하지 않으면 컨테이너로 짐을 옮긴다’는 데 동의했다.
SMIT는 협력업체와 하청업체들에게 전화해 가장 강력한 출력의 예인선들을 수소문했다. 이탈리아의 예인선 ‘카를로 막뇨’가 홍해에서 이집트로 출발했다. 네덜란드 대형 예인선 ‘알프 가드’도 시동을 걸었다.
엘사예드는 에버기븐호에서, SCA 오사마 라비 청장은 준설선에서 작업을 지휘했다. 엘사예드와 라비 청장은 상당 시간을 교신에 할애했다. 선원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였다. SCA 선원과 공학자, 운전사들은 수로 옆 군용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는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들은 견인줄을 연결하고 예인선 엔진의 동력을 짜내고 굴착기를 운전하느라 기진맥진한 하루를 보냈다. 그같은 작업 결과 에버기븐호가 약 1m 정도 움직였다. 엘사예드는 “좋은 신호”라며 “일단 움직였다. 내일은 더 움직일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그는 누군가 다칠까 두려웠다. 자신의 아들도 예인선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예인선 작업교대 동안, SCA 소속 작은 보트 5대가 줄을 지어 에버기븐호 측면을 뱃머리로 밀어붙였다. 에버기븐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반대편에선 선원들이 줄지어 견인줄을 잡아당겼다. 만약 에버기븐호가 갑자기 측면으로 쓰러진다면, 뱃머리로 밀어붙이던 보트들은 장난감처럼 으깨질 것이었다.
한편 에버기븐호가 갑작스레 모래늪을 벗어날 경우 견인력을 받던 관성으로 뱃머리가 반대편 제방과 충돌할 위험도 있었다. 이쪽에서 좌초됐다 다시 다른 쪽으로 좌초되는 상황이다. 엘사예드는 선원들에게 100m 로프 4개를 육지와 배에 연결하도록 지시했다. 배가 갑자기 물로 끌려나와 뱃머리가 너무 많이 회전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형 예인선 알프 가드가 3월 28일 등장했다. 에버기븐호가 좌초된 지 엿새가 다 된 날이었다. 그날 밤 슈퍼문이 예고됐다. 이례적으로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날이다. 달의 중력이 홍해의 조수를 최고도로 높이게 된다. 만약 인양 선원들이 짐을 부리지 않고 에버기븐호를 끌어낼 수 있다면 이때가 최적기였다.
엘사예드는 새로운 방안을 제안했다. 만조때 이용하던 예인선을 간조때에도 쓰자는 것. 그는 조류의 도움으로 에버기븐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인정받는 통설은 아니었지만, 여러날 조류와 싸워 본 엘사예드 팀은 간조때 조류의 흐름이 견인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바닷물은 자정 때 최고조에 달했다. 29일 이른 새벽, 선원들은 배에 줄을 걸어 견인선 알프 가드에 연결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조수가 낮아졌다. 예인선 선장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에버기븐호 선미가 조용히 제방으로부터 멀어지며 움직이고 있었다. 뱃머리는 여전히 모래밭에 박여 있었지만 선체 절반은 뭍에서 해방됐다.
두번째 대형 예인선 카를로 막뇨가 도착해 선미를 끌어내는 알프 가드에 합류했다. 수시간 동안 두 예인선은 전력을 다했다. 조류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점심 때 작업을 중단했다. 아직 가시적인 진전은 없었다. 오후 2시 조류가 바뀌어 상황이 유리해졌다. 엘사예드는 모든 예인선에게 다시 한번 작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짐작한 대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엘사예드는 칸다벨 선장과 함께 에버기븐호 함교에 있었다. 뱃머리가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더니 단번에 휙 물로 끌려나왔다. 수석 도선사인 엘사예드는 예인선 선장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무전기로 들었다. 에버기븐호가 제방으로부터 멀어지자, 뱃머리와 육지를 연결한 로프가 차례대로 ‘휙’ 총성을 울리며 끊어졌다. 엘사예드는 칸타벨 선장에게 엔진 출력을 높이라고 말했다. 앞에 놓인 구조선들을 피해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라비 청장은 이집트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에버기븐호의 구조 소식을 알렸다.
엘사예드는 나지막이 ‘알함두릴라’(Al-Hamdulillah)를 읊조렸다. ‘모든 찬미를 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는 동료들과 몇장의 기념사진을 찍고선 다시 SCA 통제본부로 돌아갔다. 400여척이 넘는 배가 수에즈운하에 진입하기 위해 대기중이었다.
에버기븐호가 구조된 후 수에즈운하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SCA팀은 대기중인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많게는 하루 80척의 배를 인도했다. 엘사예드는 과로한 업무에 지친 도선사들이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버기븐호가 구조되고 며칠 후 SCA 소속 보트가 뒤집혀 직원 한 명이 사망했다. 대기중인 선박을 모두 통과시키는 데 꼬박 엿새가 걸렸다. 이후 엘사예드는 알렉산드리아 항구 자신의 집으로 귀가했다. 2주 넘게 보지 못한 가족이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APM터미널의 스벤젠은 산더미처럼 밀려들 화물에 대비하고 있었다. 각 항구의 작업용량을 늘리려 노력했다. 노조와 긴급합의를 통해 작업시간을 늘렸고, 크레인 정비작업을 뒤로 미뤘다. 수천개의 추가 컨테이너를 들이기 위해 창고를 깨끗이 비워뒀다. 화물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자칫 실수라도 벌어지면 가뜩이나 낮은 APM터미널의 이익률은 더 쪼그라들 상황이었다. 스벤젠은 “테트리스 게임과 비슷하다. 공백이 없도록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페인 남동부 항구 발렌시아에서 벌어졌다. 발렌시아항의 저장공간은 이미 가득찼다. 선적을 기다리는 수출상품 때문이었다. 밀렸던 컨테이너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이를 감당할 공간이 없었다. 정상으로 복귀하려면 한달 내내 매일 24시간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에버기븐호 구조로 수에즈운하가 정상으로 회복된 뒤에도 칸타벨 선장과 선원들은 여전히 선상에 머물러야 했다. 이집트 당국은 이들을 수에즈운하 중간에 위치한 그레이트비터 호수에 억류했다. 칸타벨 선장은 불안했다. 보통 해상사고 이후 책임소재에 대한 당국의 법의학적 조사가 이뤄진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에버기븐호에 선원을 공급한 독일 '베른하르트 슐테 선박관리기업'은 성명서에서 "우리는 칸타벨 선장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그는 사고 기간 동안 전문적이고 성실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4월 13일 SCA는 이집트법원에 '에버기븐호를 압류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배의 주인인 일본 쇼에이기센에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낼 목적이었다. SCA는 법원에 낸 자료에서 "우리는 특별하고 전례없는 작업을 벌여 배를 구조했다. 그 노력은 보상 받아야 한다. 쇼에이기센은 제반경비에 2억7200만달러, 구조보너스에 3억달러, 정신적 피해를 포함한 피해배상에 3억4400만달러 등 9억1600만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지급이 완료될 때까지 에버기븐호와 화물을 동결하고 선원들을 억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22일 SCA와 쇼에이기센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이 이스마일리아 법정에 모였다. 수많은 당사자들이 포함된, 막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소송이었다. SCA가 주장하는 대로 10억달러에 육박하는 배상액 지급이 결정된다면, 그 부채는 일본선사가 아닌 전세계 해상보험 기업들의 연대해 내야 한다. 각각의 보험사 역시 법원 판결에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소송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레이트비터 호수에 동결된 1만7000개 이상의 컨테이너도 있었다. 이 배에 짐을 실은 나이키와 레노보 등 주요 기업들도 이스마일리아 변호사를 보냈다.
이날 아침 법원 주변은 한 뉴스 보도로 왁자지껄했다. 에버기븐호 선사인 쇼에이기센이 SCA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이집트의 저명한 변호사 아슈라프 엘 스웨피를 선임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재판은 오전 11시 시작됐다. 약 12명의 변호사가 4명의 판사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호소했다.
SCA 대리 변호사는 "SCA는 에버기븐호를 거의 단독으로 구조했다"며 "9억1600만달러는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구조작업이 없었다면 전세계는 대재앙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쇼에이기센을 대리한 엘 스웨피 변호사가 나섰다. 그는 느린 억양으로 "어느 누구도 SCA의 영웅적인 구조노력을 의심할 수 없다"면서도 "쇼에이기센은 SCA와 협상해 합의를 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SCA가 거부했다. 따라서 에버기븐호 항해데이터 기록장치(VDR)를 증거로 제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부분적으로 공개한 자료엔 SCA 소속 두 도선사의 언쟁이 담겨 있었다. 한 도선사가 "진입해"라고 말하면 다른 도선사가 "안돼, 진입하지 마"라고 다른 지시를 내렸다. 또 한 측이 "바람이 세"라고 말하면 다른 측은 "바람이 세지 않아"라고 반박했다. 두 도선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격하게 싸우다 급기야 한 도선사가 "배를 떠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도 나왔다. SCA 도선사들의 행동이 에버기븐호 좌초의 원인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첫번째 공개물이었다. 엘 스웨피는 "혼란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얘길 하고 싶지 않다. 부끄럽다"며 "수에즈운하는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을 나온 그는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에게 "모든 진술은 법정에서만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VDR 녹음의 전체 내용을 공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법원은 해당 사건을 다른 법정으로 이송했다. SCA는 배상액을 약 5억5000만달러로 크게 줄였다. VDR 녹음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뒤, 에버기븐호 보험사들은 SCA와 분쟁 해결에 원칙적으로 잠정 합의했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른 소송들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쇼에이기센은 영국 해사법원에 '최대배상액을 제한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에버기븐호 때문에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해 손해를 본 다른 선사들이 쇼에이기센을 상대로 각종 소송을 제기한 탓이다. 또 선사들과 보험사, 재보험사 간에 물고 물리는 소송도 예상된다.
약 3개월 동안 그레이트비터 호수에 억류돼 있는 칸타벨 선장과 선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4일(현지시각) 일본 쇼에이기센 쪽과 SCA가 배상금 협상을 최종 타결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에버기븐호는 오는 7일 출항할 예정이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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