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역사탐구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① 1900년대 초반 근대 도서관

1900년대 계몽운동으로 시작 … 사립 공공도서관 설립

2022-01-13 11:32:03 게재

여성 위한 '부인독서실' 설치도 주목 … 대한도서관·경성도서관 등 일부 설립자 '친일행적'은 문제

#최근 유지 오한영씨가 대한도서관을 열심히 경영하고자 함은 이미 보도했거니와 인원을 선정함이 다음과 같으니 도서관장은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원장은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은 학부대신 이완용이오. 평의원은 민상호, 윤치호 등 25명이다. 어제 민영기씨 집에서 회동해 설립방침을 협의했고 관사와 자금 마련에 관한 일체 사항을 관장 이하 의원들이 자체 부담하기로 확정했다. (황성신문 1906년 3월 26일 '도서관평의회' 기사 전문을 풀어씀)

1906년 3월 황성신문 기사에는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의 첫 근대적 개념의 국가도서관인 대한도서관 설립을 준비하는 내용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근대 도서관이 들어오기 이전인 조선시대 도서관 기능을 수행했던 기관은 이용 대상이 관료 등으로 제한돼 있었다. 계몽운동의 하나로 근대 도서관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대중의 자유로운 독서·토론, 이를 기반으로 한 생활의 변화, 학문의 발전 등을 꾀하는 첫걸음이 시작됐다.

황성신문 1906년 3월 26일자. 빨간색 표시 기사가 '도서관평의회' 기사.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대한도서관, 국가도서관 지향 = '한국 도서관사'(송승섭/한국도서관협회)에 따르면 대한도서관 설립은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시작했다. 같은해 2월 대한매일신보 기사에는 이범구 이근상 등이 모여 대한도서관 설립을 발기하고 창설 준비를 위한 평의원회를 구성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범구는 일본 책과 백과사전 32질을 기증했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홍준식은 2700여권을, 안경선은 '사서(四書)' 등 서적과 사무용품을 기증했다.

대한도서관 평의원회는 같은해 3월 도서관장에 민영기 탁지부대신, 평의원장에 이재극 궁내부대신을, 서적위원장에 이완용 학부대신을 선임하고 윤치호 등 25인의 평의원을 선출했다. 대한제국의 '대신'이라는 관직은 국가 행정을 책임지는 각 부처 장관들을 뜻한다. 예컨대 탁지부는 오늘날 국가재정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부서다. 대한도서관은 민간이 주도했으나 국가도서관으로서의 위상을 모색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다.

다만 대한도서관은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수집한 장서 10만여권을 조선총독부에 빼앗기고 만다. 아쉽게도 대중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시작하기 이전이다.

이범승이 설립한 경성도서관.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8000환 모아 '대동서관' 개관 = 송승섭 명지대 교수는 "대한도서관은 당대 한국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려고 한 첫 시도라는 점, 국가도서관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면서 "주요 관료들이 대한도서관 설립에 참여한 것은 당대 지도층이 인식하고 있는 도서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친일파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누구를 위한 도서관 건립이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아쉬움을 덧붙였다.

같은 시기, 지역 유지 등을 중심으로 사립 공공도서관 설립 운동이 시작됐다. 1906년 평양에서는 지역 유지인 진문옥 곽용순 김홍윤 등이 당시 큰 금액인 8000환의 설립기금을 마련해 도서관 '대동서관'을 설립했다. 도서관이 서북지역 신문화운동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같은해 4월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대동서관은 개관 당시 1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동서관은 개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대출권수가 수천여권에 달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됐다.

대동서관은 당시 존재했던 '서적종람소'라는 유형의 기관으로 분류된다. 도서관 역할에 더해 직접 책을 출판했으며 판매했던 기관이다. 1907년 황성서적조합과 1908년 광동서관도 서적종람소였다.

이후 도서관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이 문화통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1920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1920년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윤익선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경성문고 서적 대부분과 지역 유지들이 기부한 도서 등을 더해 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 그는 도서관운동을 사회교육 사업의 하나로 인식했다. 특히 여성을 위한 '부인독서실'을 설치한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윤익선 등은 경성도서관 운영에 전재산을 투자했고 기부금을 받아 도서관을 운영했다.

그러나 윤익선의 경성도서관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다 서울(당시 경성) 종로 탑골공원 근처에 또 다른 경성도서관을 건립한 이범승에 인수돼 분관으로 운영됐다. 다만 윤익선과 이범승 둘 다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돼 있어 공과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895년 유길준 '서유견문'. 근대 도서관 개념을 소개했다. 사진 현담문고 제공

◆'서유견문' 등 근대 도서관 알려 = 한편 우리나라에 근대 도서관 개념을 소개한 첫 문헌은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 도서관사'에 따르면 서유견문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근대 도서관 개념을 소개한 문헌은 존재했다. 다만 서유견문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국한문혼용체로 근대 도서관을 소개했다는 의의가 있다.

서유견문은 도서관에 대해 "서적고는 정부가 설립한 것도 있고 정부와 국민이 협력해 세운 것도 있다. 경서, 역사책, 각종 학문의 서적, 고금의 명화 및 소설로부터 각국의 신문에 이르기까지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중략) 이와 같이 도서를 수집해 모아 두는 것은 세상에 무식한 사람을 없애려는 데 주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의 여러 나라에는 도시마다 도서관이 없는 곳이 없으며 누구든지 책을 열람하고자 하면 도서관에 가서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썼다.

이보다 앞선 1884년 3월 한성순보의 '이태리가 날로 강해지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탈리아와 일본 사례를 중심으로 도서관에 대해 설명했다. 기사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들어가서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공개해둔다" "국민을 이끌어주고 교화하는 훌륭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 연재기사]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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