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바른 우리말쓰기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쉬운 우리말…학생 참여 수업으로 호평
지난해 고교 국어 정규수업 이어 탄탄한 이론적 배경 담은 심화수업 모델 개발 … 고교생들, 설문조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
6일과 12일, 2차례에 걸쳐 서울 서초구 세화여고에서 특별한 수업이 이뤄졌다. (사)국어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고 내일신문이 주관한 ‘쉽고 바른 우리말 쓰기’ 특강이 열렸다.‘쉽고 바른 우리말 쓰기’ 운동은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표현과 외래어를 쉽고 바른 우리말로 바꾸어 국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통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대중을 상대로 소통할 때 사용하는 언어인 공공언어는 국민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누구나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같은 문제 의식을 학생 때부터 공유하고자 시작한, 고등학생 대상 쉬운 우리말 교육 사업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뤄졌다.
◆공공언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 주로 정규 수업을 활용해 쉬운 우리말 사용의 중요성을 알리고 저변 확대에 집중했던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는 탐구형 특강 강좌를 열어 심화된 교육 모델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더 다양한 학교의 학생들에게 쉬운 우리말의 중요성을 알렸다. 특히 새롭게 개발된 탐구 집중형 모델은 학생들이 우리말과 공공언어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통해 언어 사용 개선이라는 일차원적 사고를 넘어 공공언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언어 역할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번 강의는 공공언어의 현 실태와 개선방향, 디지털 문해력 격차와 언어 취약 계층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언어 사용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다뤘다.
수업을 이끌어간 박지순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쉬운 우리말 사용의 중요성은 개인적 차원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주요 안건”이라며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는 지적을 내놨다. 특강에 참여한 25명의 학생들 또한 박 교수의 설명에 동의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우리말 사용의 사회·경제적 효과 = 이어 박 교수가 ‘1979년 영국에서 저소득층 모녀가 난방비 신청 서식을 이해하지 못해 얼어 죽은 사건’에 대해 언급하자 학생들은 놀라움을 표하며 “공공언어는 생명의 언어임을 깨달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쉬운 우리말의 사회적 비용 절감 효과도 거론됐다. 국어문화연합회의 2021년 ‘공공언어 개선의 정책 효과 분석’에 따르면 어려운 공공언어를 바꾸면 연간 비용 절감 효과가 3375억원 나타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귀책사유 봉입 불비 익일 내점 고시’ 등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을 시 일반 국민과 민원 처리 공무원의 시간 비용 절감 효과는 민원 서식 1952억원, 정책 용어 753억원, 약관 및 계약서 79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민원 서식에 쓰인 어려운 용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만 따져 봐도 2010년 약 170억원에서 2021년 1952억원으로 약 11.5배가 늘어났다.
박 교수는 “행정기관이 새로운 정책에 생소한 외국어를 붙일 때마다 우리나라에 경제적 손실은 커져간다”며 “2000년대 초반 미국 워싱턴 주정부가 쉬운 용어로 공문서를 작성하자, 당초 목표치보다 80만달러가 초과된 세수익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또한 2006년 미국 애리조나 국세청이 행정 서식을 알기 쉽게 변경하자 문의 전화 감소로 담당 공무원의 업무 가능 시간이 증가함으로써 전년 대비 약 3만건의 민원을 추가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어 위상 하락하면 ‘제2의 한강’ 없어 = 비용 외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언어는 학문으로서 굳건한 자리를 지킬 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박 교수는 융성한 역사를 지녔다가 사라진 국가의 지배세력의 언어였던 몽골어와 만주어를 예로 들며 “우리가 우리말을 쓰지 않아 한국어의 위상이 떨어지면 더 이상의 ‘한강’은 나올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상용어와 전문용어의 괴리가 커질 경우 이에 대한 해석에 시간과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며 이는 매우 ‘소모적인 일’이라며 강연을 마쳤다.
◆2차시 발표할 조별 주제 논의 = 6일 수업의 마지막에 학생들은 12일에 발표할 조별 탐구 주제를 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5인씩 한 조를 이룬 학생들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 끝에 각 조마다 쉬운 우리말 사용을 핵심으로 한 다양한 주제를 내놨다. 조별 주제는 △1조 ‘청소년 문해력 저조 현상과 쉬운 우리말에 기반한 해결방안’ △2조 ‘쉬운 우리말의 관점에서 본 청소년 은어 사용실태’ △3조 ‘키오스크 관련 디지털 문해력’ △4조 ‘언어의 난이도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으로 바라본 쉬운 우리말의 중요성’ △5조 ‘과도한 외래어 사용의 실태 및 문제점과 해결방안’으로 정해졌다.
◆쉬운 우리말 사용의 중요성 깨달은 시간 = 발표는 조별로 20분씩 주어졌다. 각 조는 애써 만든 발표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한 사람씩 자신이 준비한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첫 주자 4조는 ‘언어의 난이도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으로 바라본 쉬운 우리말의 중요성’을 주제로, 언어가 사람의 사고와 세계 인식을 결정짓는다는 ‘언어 결정론’을 언급하며 언어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뇌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보여줬다.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과도한 외국어 표현이 노년층에게 소외감과 혼란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쉬운 우리말을 쓰는 것은 세대와 계층 간 언어 격차를 줄이고 갈등을 해소하는 최적의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청소년 문해력 저조 현상과 쉬운 우리말에 기반한 해결방안’을 발표한 1조는 청소년 문해력의 현주소를 알고자 설문조사를 진행, 결과를 보여주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면서 과거와 비교해 현저히 떨어진 청소년 문해력의 원인을 독서량 감소와 한자 학습이 사라진 공교육의 변화, 스마트폰 사용 증가로 꼽으며 문해력 격차는 향후 경제적 격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 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말을 자주 사용하고, 교과서 속 어려운 단어를 쉬운 말로 순화하며,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단어를 일상어로 풀어내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다음은 ‘청소년의 은어 사용 실태’를 조사한 2조의 차례가 이어졌다. 청소년들이 많이 사용하는 은어 ‘개추’(강력하게 추천함) 등에 대해 학생들이 이에 대한 뜻을 알고 사용하는지를 구글폼과 벽보 설문조사를 통해 수집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학생이 정확한 뜻을 모른 채 은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쉬운 우리말로 순화한 은어 사전의 제작 방안을 내놨다.
3조는 10~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고령층일수록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입증했다. 선택지에 쓰이는 단어가 어려울 경우 사용자들의 혼란이 가중됐고 그로 인해 기술 자체에 대한 거부감마저 커진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마지막 주자인 5조는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쓰이는 외래어가 우리의 일상에 가져오는 불편함에 대해 집중 탐구했다.
결과적으로 조사에 응한 과반 수 이상이 음식점 카페 쇼핑몰 은행 전자기기 등 여러 분야에서 외래어나 외국어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은 물론 의사소통에서도 어려운 말이 벽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은 “쉬운 우리말 쓰기의 중요성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언어가 배려라는 걸 느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문해력과 경제력이 연관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공기나 물처럼 당연히 늘 함께 할 거라고 여겼던 우리말이 소중히 아끼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바뀐,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진 수업이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내일신문·국어문화원연합회 공동기획
송현경 기자·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사진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