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②1920년대 조선총독부도서관
'사상감시자'였던 총독부도서관 … 일본어책 위주 장서
고학력자 위주 연평균 25만~35만명 이용 … 해방 이후 한국인 직원들 '도서수호문헌수집위원회' 조직, 국립도서관으로
1920년대 대표적 도서관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3.1운동 이후 문화정치 시기인 1925년 정식 개관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운영됐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중앙도서관 역할을 부여해 다른 도서관들을 지도·감독하며 '사상감시자'로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다수의 한국인이 근무했고 일본이 서양에서 배운 각종 사업을 추진해 우리나라 도서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또 당시 전국에서 가장 장서량이 많았다. 고학력자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이용자수도 상당했다.
◆사상 지도·교육 등 목적 =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부서의 하나로 식민지 동화정책을 수행하고 한반도 관련 자료를 수집해 조선통치를 강화했다. 1924년 1월 16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운영방침이 언급된다.
"본 도서관의 이상은 (가) 특히 조선통치의 주의 방침에 의해 사상을 잘 지도하며 교육의 보급, 산업의 진흥 등에 관한 신구 참고도서를 갖출 것 (나) 조선민족의 문헌을 모을 것 (다) 널리 조선 연구에 관한 화한양서(和漢洋書, 일본어책·한문책·서양책)를 갖출 것, (라) 조선 전체에 도서관의 보급발달을 도모해 그 지도자가 될 것 등."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일본어책 위주로 장서를 갖췄고 한국어책의 비중은 극히 적었다.
국립중앙도서관사에 따르면 1931년 장서수는 10만권에 이르렀고 1937년에 이르러 20만권에 육박했다. 당시 문맹률이 80%를 넘는 상황에서 이용자들은 주로 일본어책을 읽을 줄 아는 학생 등 고학력자였다. 일반인들은 일본어 이해 능력 부족, 빈약한 한국어 자료와 검열 등으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본관은 1923년 말 지금의 서울 을지로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준공됐다. 보통열람실 특별열람실 대출실 신문잡지열람실 등을 갖췄으며 열람석은 257석이었다.
이용자에게 열람료를 받았는데 1회 4전씩이었으며 일부 시설 이용은 무료였다. 개관시간은 계절별로 달랐으나 오전 8~10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다.
사서수는 1925년 개관 당시 3명에서 1942년 18명으로 늘었다. 전체 직원은 19명으로 시작해 1940년 77명으로 계속 증가했으나 이후 징용과 징병으로 급속히 줄어들었다.
직원들 중 한국인은 50여명에 달했다. 주로 하위직이었으나 이재욱은 부관장에, 박봉석은 3번째 직위까지 올랐다. 이들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이 해방 이후 국립도서관으로 재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중문고·부녀자문고·신문 열람 무료 = 조선총독부통계연감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3년까지 연평균 25만~35만명이 이용했다. 국립중앙도서관사를 보면 개인 공부가 가능한 열람석은 시험 준비를 위한 학교 학생들과 취업 준비생들이 주로 이용했다. 열람석이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섰다.
일반인들을 위해 일부 한국어책을 비치한 대중문고와 부녀자문고도 갖췄다. 이곳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대중문고는 1932년 60명이 이용할 수 있는 30여평 규모의 시설로 시작했다. △독학자를 위한 자습서 △직장을 갖고자 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각종 자격시험준비 도서 △교양 도서 등을 서가에 진열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했다.
부녀자문고는 본관 일부에서 시작했다가 1935년 아동석 30석, 부인석 20석을 갖춰 독립했다. 이용자가 늘면서 1940년 본관 뒤쪽 30여평 규모로 별도 건물을 신축해 옮겼다.
본관에 위치했던 신문잡지열람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항상 신문을 읽는 이용자들과 열람 대기자들이 몰려 1937년 독립 건물로 확장했다.
◆전국 순회문고·사서 교육 =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각종 도서관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순회문고 사업이다. 장서수가 10만권을 넘기면서 순회문고 사업을 시작했다.
지역 도서관의 부족한 장서를 보충하기 위해 일정 장서를 대출하는 사업이었다. 순회문고 사업은 부산 함흥 신의주에서부터 시작해 목포 개성 대구 원산 대전 등 전국 9개 지역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운영됐다.
50여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무 상자를 만들어 이 상자에 책을 넣어 발송했다가 1달여 만에 반납을 받았다. 순회문고는 철도로 수송했기 때문에 책이 손상되지 않도록 나무 상자를 견고하게 제작했다.
또 다른 사업 중 하나는 도서관 사서 교육 사업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전국 도서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개최했다. 우리나라에서 도서관 운영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최초로 도서관 강습회가 열렸으며 1936년, 1938년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의 부대 기관인 도서관사업회가 개최했다. 이후에는 현 한국도서관협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선도서관연맹이 계속 개최했는데 이 역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지원 아래 이뤄졌다.
도서관 강습회에는 보통 100여명이 참석했고 도서관학개론, 학교도서관 등 도서관관리법, 조선고문헌일반, 화한양서분류법 등을 가르쳤다.
◆태극기 게양, 도서관 수호 = 현 국립중앙도서관은 해방과 함께 1945년 10월 15일 국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장서 28만4457권, 직원 34명, 예산 38만3296원으로 첫발을 뗐다.
국립중앙도서관사에 따르면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도서관에는 한국인 직원들만 출근해 도서관을 확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인 직원들과 만나 각 서고의 열쇠를 인수해 전체 장서를 확보했다. 이후 3명씩 번갈아 밤을 새워 서고를 지켜 장서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다음날에도 한국인 직원들은 전원 출근, '도서수호문헌수집위원회'를 조직하고 '문헌수집대'를 구성했다. 박봉석 도서수호문헌수집위원회 위원장은 '도서관협회결성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서울 각 도서관의 확보에 주력하고자 했다. 1945년 9월 1일 건국준비위원회도 박봉석 위원장을 문화시설전문위원으로 위촉하고 조선총독부도서관 등을 책임지고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1945년 10월 16일 미 군정청은 이재욱을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박봉석을 부관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앞서 1945년 10월 7일부터 국립도서관은 정문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직원을 채용, 개관 준비를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