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서관 역사를 찾아서│③ 1960년대 마을문고 운동
마을문고·독서회 조직, 생활 개선까지
엄대섭 선생 주도·농어촌 중심 최대 3만5000여곳 … 주민들 스스로 읽고 토론
1960년대 농어촌을 중심으로 마을문고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공공도서관의 수가 극히 적은 가운데 마을문고는 한때 최대 3만5000여곳(당시 농어촌 지역의 95%)에 이르러 주민들 시민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했다.
마을문고는 주로 농어촌 지역의 마을회관 등에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이 독서회를 조직해 스스로 책을 읽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농어촌 지역의 청년들은 마을문고를 중심으로 책을 읽고 토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농사법 등에 기술을 도입하고 생활을 개선했다.
마을문고 운동을 시작한 이는 도서관운동가·사상가인 엄대섭 선생이다.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마을문고운동과 1980년대 대한도서관연구회 활동에 이르기까지 도서관운동에 헌신했다.
◆도서관의 축소판, 주민 자율 강조 =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1960년대 공공도서관 수는 극히 적었다. 한국도서관협회 한국도서관통계에 따르면 1960년 도서관수는 18개관에 불과했다. 도서관을 기반으로 독서를 통한 시민교육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와 한국도서관협회 등 민간에서 '농촌 책 보내기 운동'에 나섰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농촌 주민들이 수동적으로 책을 제공받는 방식인데다 농촌으로 보내지는 책이 대체로 낡고 농촌 주민들이 원하는 책과 거리가 있다는 점 등이 효과가 낮은 이유로 지목됐다.
이런 상황에서 엄대섭 선생은 초기 자금을 마련하고 '마을문고진흥회'를 조직해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문고 운동을 시작했다. 마을문고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주체가 돼 책과 독서를 중심으로, 1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데 목적을 뒀다.
이를 위해 지역별로 마을회관 등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마을문고함을 설치, 수백여권의 책을 비치했다. 마을문고함을 설치함으로써 마을문고가 도서관의 축소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또 지역 주민들의 독서회를 조직해 마을문고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스스로 필요한 책을 구입하는 등 마을문고를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엄대섭 선생과 함께 당시 마을문고 운동에 주력했던 이용남 전 한성대 총장은 논문 '마을문고 운동의 초기 전개 과정에 관한 연구'에서 마을문고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을문고 운동은 마을 지도자들에 의한 자율적이고 자조적인 독서운동이란 점을 강하게 표방했다. (중략) 마을문고는 일방적인 책 보내기 운동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독서회가 중심이 돼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해 운영해 나가는 자율적인 방법의 독서운동이라 할 수 있다."
◆농사법·생활에 책 내용 적용 = 마을문고 운동은 지역의 독서 활동의 물론 농사법·생활 개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책 '공공도서관 엄대섭이 꿈꾼 지식 나눔터'(최진욱/현북스/2021년)에 실린 엄대섭 선생의 글을 보면 청년들은 독서회 활동을 중심으로 책을 읽고 생활을 개선해 나갔다.
청년들은 등잔 기름이 표가 나게 줄어들 정도로 밤을 새워 읽고 나무하러 가는 데도 책을 가져갔다. 닭 돼지를 키우는 데 축산에 관한 책에 실린 내용을 반영했으며 곡식이나 채소 종자 활용, 농약 이용 등에도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적용했다. 이는 부엌 화장실 식생활 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문 '마을문고 운동의 초기 전개 과정에 관한 연구'에 실린 1967년 '마을문고의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보면 독서회는 문고관리와 도서구입비 마련을 위한 공동작업 등의 기본활동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성인교육활동(독후감발표회 야간교육 교양강좌) △마을지도 및 미화활동(농업기술보급 생활개선 미화작업) △오락활동(음악회 운동경기) △영세농가 돕기 활동 등이 그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마을문고의 효과로 △독서의욕 및 교양향상 △향학열 고취 △과학적 영농방법에 대한 관심 △여가선용과 청소년 선도 △공동목표를 지향하는 협동심 함양 등이 언급됐다.
◆공공도서관 보완 운동 = 마을문고 운동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마을문고 운동이 공공도서관을 대체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이 적게 보급된 현실에서 마을문고가 공공도서관의 분관이 돼 공공도서관을 보완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실제로 마을문고가 공공도서관의 분관으로 역할을 했다. 예컨대 봉암 마을문고는 2000년대 이르러 양주시립도서관 분관으로 운영됐다. 강진군의 경우 1965년 군립도서관이 개관한 이후 군 내 여러 마을문고들이 군립도서관과 연계해 활동했다.
다만 마을문고 운동은 자금 부족으로 운동 기간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엄대섭 선생은 1967년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후락 비서실장을 어렵게 독대했고 그에게 마을문고진흥회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안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마을문고 운동은 상당 기간 재정난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 재정난은 이어졌다. 이에 마을문고는 198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흡수돼 새마을문고로 바뀌었고 시민 주도로 운영하던 정체성을 잃고 관 주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