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지역 자연복원
자연복원이 인공조림보다 숲 재생속도 훨씬 빨라
활엽수가 우세종으로 자라 자연스럽게 '방화수림' 형성 … 산불 피해지에서 불탄 나무 제거하면 '토양유실' 커
산불 피해지역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여기에는 상반된 두 입장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인공조림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복원이다. 인공조림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늘 이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다.
산불 피해지 복원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대두된 것은 1996년 고성산불 직후였다. 당시 자연복원 주장이 여론화되면서 산림당국은 고성군 죽왕면에 자연복원연구지역(100ha)을 설정했다. 그러나 전체 피해지 3762ha 중 2908ha에 조림이 이루어졌고 산꼭대기나 경사지, 암석지 등 조림할 수 없는 곳을 방치한 수준이었다.
2000년 동해안산불 이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인공조림이냐 자연복원이냐' '침엽수를 심느냐 활엽수를 심느냐'가 핵심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산림청, 환경부, 강원도, 시민단체 추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민관학연 공동 조사단을 구성했다.
2000년 6월에 조직된 공동 조사단에는 176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조사단은 9개 분야 19개 팀으로 나눠 △산불 피해 △식생과 맹아·어린나무 상태 △숲 환경 △동식물 자원 △송이 등 산림농업 △복구방법 등을 평가했다.
당시 산불 피해지의 80% 이상이 자연복원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1년 확정된 '산림복구 5개년 계획'에 따라 동해안산불 피해지역의 52%는 인공복구, 48%는 자연복구로 복원됐다.
"불에 탄 나무들을 다 제거하고 민둥산을 만들었습니다. 저기 임하호로 내려가는 골짜기에 흙탕물이 가득합니다. 여름에 큰비가 오면 미세한 점토 성분이 쓸려내려가 임하호 수질오염이 걱정될 정도입니다."
지난달 27일 안동시 임동면 산불 현장에서 만난 황정석 산불정책연구소장(산림학박사)의 말이다.
황 소장은 "2000년 동해안 산불 피해지의 절반 가까이가 자연복원에 성공했다"며 "그런 좋은 사례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최근 들어 무조건 피해목 제거와 인공조림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했다.
다음날 찾아간 강릉 옥계산불 현장도 참혹했다. 한라시멘트 공장 옆에서부터 바닷가 고속도로 바로 옆까지 거대한 민둥산이 펼쳐졌다. 마치 고비사막 한가운데 이어지는 모래언덕을 보는 느낌이었다.
'활엽수 방재림' 시범사업이 도입됐지만 가까이 보니 소나무 단순림으로 조림한 곳도 많았다. 문제는 예산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이런 인공조림의 숲 복원 속도가 오히려 더 느리다는 점이다.
◆2000년 동해안 산불의 교훈 = 2004년 정연숙 강원대 교수팀이 '동해안 일대 산불 피해지 자연복원 과정'을 연구한 논문을 보자.
산불 발생 후 5년까지는 초본층과 관목층(작은키나무)이 맹아(움싹) 형태로 재생되고, 5년 뒤부터는 아교목층(중간키나무)이 자라기 시작한다. 13년이 지나면 교목층(큰키나무)이 자라고 20년 뒤에는 교목층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산불 후 5년이 지나면 작은키나무와 초본층이 2층 구조를 형성하고 15년이 지나면 중간키나무와 작은키나무, 초본층이 3층 구조를 형성한다. 20년이 지나면 큰키나무, 중간키나무, 작은키나무, 초본층이 4층 구조를 완성한다. 이것이 동해안 산불지역의 일반적인 식생 발달과정이다.
20년이 지나면 큰키나무들은 높이 16미터 이상 자란다. 큰키나무가 지표면을 덮은 비율인 '식피율'은 80% 이상이다. 중간키나무의 키는 2~6미터, 식피율은 20~70%에 이른다. 작은키나무의 키는 1~2미터, 식피율은 20~70%다.
정연숙 교수는 "이런 식생 발달 속도는 민둥산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5~10년 정도 빠른 것"이라며 "이는 원 나무뿌리가 땅속 깊이 박혀있어서 여기서 싹트는 맹아(움싹)가 자라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 교수는 "참나무 맹아의 출발점이 마라톤코스에서 10km 쯤 간 곳이라면 씨앗에서 싹이 난 소나무의 경우 0미터 시작지점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다"며 "산불 피해지를 자연복원에 맡기면 산림청에서 강조하는 활엽수 중심의 방화림이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까맣게 불탄 나무만 보이는 산불 피해지 토양 속에는 숲에 있던 나무뿌리, 땅속줄기, 씨앗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바닥의 낙엽층은 타서 없어졌지만 영양분도 풍부하고 햇빛을 가리는 경쟁자도 없다. 이런 좋은 조건 때문에 숲이 빠르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20년 만에 자연숲으로 회복하는데 = 이에 비해 인공조림지는 큰키나무층의 피도가 65%에 불과해 자연복원지보다 훨씬 낮았다. 또한 숲의 발달에서 중요한 척도인 '생물량의 축적'을 비교했을 때 모든 지역에서 자연복원지의 생물량이 더 많았다.
정 교수팀의 연구는 △자연복원지가 인공조림지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생물량을 축적하고 △20년 정도면 다양한 동식물과 미생물이 어우러져 사는 자연숲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산불 피해지에 인공조림을 할 때는 주로 1~3년생 나무를 심는다. 도로변 같은 곳은 7년생 정도의 큰나무를 심는다. 묘목 사이에 난 풀도 베주고 심지어 비료까지 준다. 그런데 왜 그냥 놓아둔 자연복원지보다 나무들이 더 느리게 자랄까?
그것은 벌채와 조림작업 과정에서 토양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벌채와 조림을 하려면 임도를 새로 내야 한다. 중장비와 사람들이 산불 피해지역에 들어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한 토양생태계가 교란된다.
정 교수팀이 분석한 결과 토양 내 영양분 창고인 부식토층과 낙엽층의 양과 깊이, 유기물 양 모두 자연복원지보다 인공조림지가 더 낮았다. 정 교수가 "인공조림을 하더라도 산불 피해지 숲 바닥이 안정된 7년 후에 하는 게 맞다"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산림청 산불복원 메뉴얼 적용해야 = 산림청 '산불피해지 복구 매뉴얼'도 산불 피해지 복구계획을 수립할 때 경사도와 참나무류 맹아의 분포 등 조건에 따라 자연복원과 인공조림을 병행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휴양림이나 일부 보호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인공조림에 의존하고 있다. △임도 건설 → △피해목 벌채 → △사방복구다. 최근 들어 수요가 급증한 펠릿 때문에 산불 피해목을 베어내 반출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산림청 관계자는 9일 "일부 언론 등에서 나온 울진산불 피해지 자연복원 방침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정부 방침은 NGO와 다른 부처 등과 함께 민관협의회를 구성해서 피해지 복원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바닷가 주민 생활권 주변은 사유림이 많아서 경제림이나 방화수림 조성 등 인공조림 중심으로 갈 것"이라며 "낙동정맥 인근이나 소광리 유전자원보호림, 급경사와 험한 지형이 많은 국유림지역은 현실적으로 자연복원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