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의 과학산책
스탈린 시대 과학자 소환하는 푸틴 러시아
러시아 침략으로 고통 받는 우크라이나에서는 80년 전 대기근(1932~1933)이 있었고, 그때 급부상한 소련 농업생명과학자가 있다. 트로핌 리센코(1898~1976)다. 리센코는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350만명이 굶어죽은 대기근 당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브의 농업연구소에서 일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에 속한 공화국 중 하나였다.
리센코는 춘화처리(春化處理) 연구로 이름을 얻었다. 식물을 저온에 노출시켜 꽃을 빨리 피우도록 하는 게 춘화처리다. 기후가 맞지 않던 지역에서도 특정 작물을 경작할 수 있고, 또 작물을 빨리 키워낼 목적으로 시도됐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겪으면서 작물 생산량을 높일 방법을 찾고 있었고 리센코는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단기간에 정치적으로 급성장했고 1940년 모스크바 소재 유전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문제는 리센코가 정통 유전학을 부정하고 '라마르크 유전학'을 추종했다는 데 있다. 라마르크 유전학은 한 생물이 살면서 얻은 생물학적 특성이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는 생각이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됐다.
그와 관련한 유명한 실험이 '쥐꼬리 자르기 실험'이다. 독일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1834-1914)은 22대에 걸쳐 쥐 수 백 마리의 꼬리를 잘랐다. '꼬리 없어짐'이라는 새로운 신체 특성이 후손에게 유전되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22대 후손의 꼬리는 최초 세대의 꼬리 길이와 같았다.
정치적 이유로 "리센코가 옳았다"고 주장
러시아는 당시 서유럽 학문을 수용하는 데 시간 차이가 있었고, 시차는 리센코를 통해 극적으로 나타났다. 리센코는 러시아 생명과학계에서 권력을 잡은 뒤 정통 유전학(맨델 유전학)을 부인하고 경쟁자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그의 공격을 받은 맨델 유전학자들은 처형되거나, 수용소 유형 혹은 투옥됐다. 그래서 리센코는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가 되었다.(로렌 그레이엄의 책 '리센코의 망령'). 러시아 농업을 재건하기는커녕 말아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1세기 초에 리센코를 다시 소환한 이유는 그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은 트로핌 리센코의 진리를 확인했다." "트로핌, 당신이 옳았다." "리센코가 바이스만주의자들과 모건주의자들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러시아의 일부 민족주의자가 쏟아내는 말들이 모스크바에서 크게 들린다.
러시아내 기류는 후성유전학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후성유전학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말한다. 획득형질이 DNA 서열 그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으나, DNA내 유전자를 켜고 끄는 '유전자 스위치'의 변화로 그게 반영된다고 한다. 유전자 스위치는 중요하다. 어떤 유전자를 발현시킬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후성유전학 증거는 '대기근' 연구에서 왔다. 2차대전 당시인 1945년 네덜란드는 독일 점령 하에서 대기근을 겪었다. 그해 2월 2만2000명이 굶어죽었다. 시간이 지나 대기근 피해자의 후손을 연구해본 결과 대기근 생존자의 후손들에 일정한 유전적인 패턴이 나타났다. 대기근 피해자의 경험이 손자 손녀 세대에 전달되었으며 이들의 건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나왔다. 연구는 '네덜란드 기근 코호트 연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후성유전학과 리센코를 연결시켜 그가 옳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게 많은 유전학자의 주장이다. 리센코는 당시 과학적인 방법으로 엄밀하게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니 "리센코가 옳았다"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푸틴의 러시아에서 왜 리센코 열기가 일고 있는가에 있다. 과학이 아니라 정치학이 그 배경이다. 러시아 사회의 민족주의 성향,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 권위주의적인 지도자 푸틴의 높은 지지와 연결되어 있다.
낙후된 정치 속에 과학도 왜곡될 수 있어
러시아인은 문학 예술에서는 물론 과학에서도 빛난다. 소련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1908~1968)의 책은 지금도 세계 물리학도가 사랑한다. 한국에도 그의 책 '고전역학'이 번역되어 있다. 러시아 수학자 블라드미르 아르놀트는 사교기하학에 기여한 주요 연구자 중 한명이다. 며칠 전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된 포항공대 수학자 오용근 교수의 연구가 그에 힘입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정치에서는 낙후된 모습이다.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덩치 큰 나라의 불안한 모습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과학도 그 속에서 어떻게 다시 왜곡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