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기업이 월등한 실적 내는 비결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 "상식의 문화, 낮은 세율이 스위스를 기업 천국으로 만들어"
5월 22~26일(현지시각) 전세계 정치와 경제 기업 학계 언론계 예술계 거물들이 '세계경제포럼'(WEF)에 모였다. 참석자들은 우크라이나사태와 글로벌 인플레이션, 식량위기 등 다양한 국제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지난 50여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전세계 주요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처럼, 천연자원이 없고 육지에 둘러싸인 소국 스위스는 전세계 기업의 천국으로 성장했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스위스엔 시가총액 기준 유럽 100대기업에 속한 기업이 13곳 있다. 전세계 500대 기업으로 넓히면 12곳이 스위스 기업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고려하면 스위스만큼 기업이 강한 나라는 없다. 다국적기업들이 스위스 총 경제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달한다. 비슷한 경제규모의 그 어떤 국가들보다 높다. 외국계 기업들이 스위스로 몰려든다. 구글은 미국을 제외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큰 공학센터를 취리히에 두고 있다. 스위스 우량기업들은 유럽 경쟁기업들보다 좋은 실적을 자랑한다. 스위스 증시는 지난 5년 동안 29% 상승했다. 프랑스와 독일 기업이 지배하는 유로스톡스50은 3% 상승에 그쳤다.
스위스 기업들의 인지도는 전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금융분야에선 UBS와 크레디트스위스, 보험분야에선 스위스리와 취리히보험, 제약분야에선 로슈와 노바티스, 식품분야에선 네슬레가 유명하다. 원자재거래분야에선 글렌코어와 군보, 시계제조분야에선 리슈몽과 파텍필립 롤렉스, 호텔분야에선 리츠 칼튼, 초콜릿분야에선 린트 & 슈프륀글리와 바리 칼리바우트의 인지도가 높다.
스위스에 탁월한 기업들이 많다는 데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네슬레 이사회 의장 폴 불케는 "스위스의 본질적 특징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이는 연방제와 직접민주주의를 혼합한 독특한 정치모델, 권한이 약한 중앙정부, 낮은 수준의 규제, 최고의 연구대학들, 그리고 연방을 구성하는 주(칸톤)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교육경쟁 세제경쟁 등에서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스위스는 가난했다. 불모의 땅으로, 한 해 내내 눈으로 덮인 지역이 많았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스위스가 19세기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었을 때, 도시이자 칸톤인 취리히와 바젤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집중적으로 전문화했다. 장크트갈렌은 섬유산업, 취리히는 비단과 방적, 베른은 치즈 거래의 중심지가 됐다. 바젤은 막 싹트기 시작한 제약과 화학산업에 집중했다. 시계제조업은 제네바에서 바젤로 뻗는 쥐라산맥에서 부흥했다. 금융과 보험산업은 제네바와 취리히에서 번성했다.
경제개발 노력을 뒷받침한 것은 영세중립국 지위였다. 1815년 비엔나회의에서 이를 보장받았다. 덕분에 20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두번의 세계대전에서 무사했다. 동시에 유럽대륙 곳곳의 충돌과 갈등을 피해 유입된 숙련인 전문인들과 그들이 가져온 현금으로 스위스는 큰 혜택을 누렸다.
'스위스 메이드 - 스위스 성공의 비화' 저자인 제임스 브라이딩은 글로벌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세계로 열린 개방성을 성공요소로 꼽는다. 대표적으로 스위스는 17세기 프랑스 위그노(신교도)와 1930년대~1940년대 독일 유태인 등 박해받는 소수자들을 끌어안았다.
또 스위스 기업신화의 중심엔 외국인들이 자리한다. 네슬레를 창업한 앙리 네슬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이다. 최고급 명품시계 파텍필립 창업주인 안토니 노베르트 파텍은 폴란드 기병대 장교였다.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레오 슈테른바흐는 폴란드 유태인으로 신경안정제 바륨을 개발했다. 이는 로슈의 대히트 상품이 됐다. 니컬러스 하이예크는 시계제조사 스와치 공동창업자로 레바논 혈통이다. 스위스 대기업 CEO 중 약 절반이 외국계 인물이다. 로슈의 CEO 세베린 슈완은 오스트리아계이고 글렌코어의 CEO 게리 네이글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노바티스의 CEO 바산트 나라심한은 인도-미국계다.
외부인들을 환영하는 스위스의 문화를 내부관계와 비교하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스위스인들은 다른 칸톤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스위스 칸톤은 헌법상 영구적 지위를 부여받으며 사실상 별개 나라 수준의 자치도를 가진다. 칸톤끼리 힘을 모을 때는 안보상 적국의 위협이 고조될 경우뿐이다.
스위스 메이드의 저자 브라이딩은 "시장에서 양배추를 사는 농부들처럼 각 칸톤은 가장 적은 자유를 양도하면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즉 가장 저렴한 사회계약을 찾아 여기저기 둘러본다"고 말했다.
강제하고 억누르는 중앙집권체제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가볍다. 행정부 격인 연방이사회는 동일한 권한을 갖는 7명의 이사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1년씩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연방이사회 권한은 거의 없는 반면 칸톤들은 2000개 이상의 지방자치시를 갖고 있으면서 많은 권한을 행사한다.
각 칸톤은 보건의료 복지 교육 법집행 재정정책을 책임진다. 기업과 노동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각 칸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당연히 법인세율은 낮다. 루체른은 2012년 법인세를 절반으로 낮췄다. 추크는 11.9%로 칸톤들 중 가장 낮은 법인세율을 내세운다.
글로벌 회계법인 KPMG는 한 보고서에서 "건지와 카타르 같은 역외 금융센터들을 제외하면 스위스 칸톤들이 부과하는 법인세율은 전세계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법인세율은 26.5%다.
칸톤 간의 경쟁은 세율에 그치지 않는다. 칸톤들은 최고 대학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과 로잔연방공과대학(EPFL)은 유럽 최고 대학들로 평가받는다. 이코노미스트는 "스위스에선 산학연계가 강력하다"며 "이는 대학 졸업생들이 기업이 원하는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고 전했다.
네슬레와 EPFL, 보주(칸톤), 로잔 소재 스위스호텔경영대학은 2020년 1월 '스위스식품영양밸리'를 시작했다. 이는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을 위한 혁신을 모색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다. 소프트웨어 제조사인 로지테크와 기술기업 시스코는 EPFL 캠퍼스에 연구센터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을 유치하는 스위스의 매력이 과거보다 약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1990년 당시 제너럴모터스(GM)와 휴렛팩커드, IBM 등 미국 20대 기업의 2/3가 스위스에 유럽 본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92년 스위스 유권자들은 유럽연합(EU) 내 단일시장 접근권을 가질 수 있는 '유럽경제지역'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데 투표했다. 그 결과 애플이나 알리바바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스위스 대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나 아일랜드 더블린 등을 유럽의 거점으로 삼았다.
지난해에도 전세계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지나쳤다. 스위스 정부는 120개 양자무역관계를 EU 내에서 하나의 조약으로 포괄하는 계획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로 스위스 일각에선 영세중립국 지위를 재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됐다. 스위스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서구제재에 동참하자 국제사회의 많은 이들이 크게 놀랐다. 로슈 부회장인 앙드레 호프만은 "과거 영세중립성을 손보려는 그 어떤 시도도 스위스 내에선 반역으로 간주됐다"고 말했다.
한편 글로벌 자산관리 분야의 강자라는 위상도 위협받고 있다. 스위스는 미국을 중심으로 투명성을 강화하라는 국제사회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탈세를 비호하지 말라'는 압박이다. 또 과거와 달리 투자수익률이 낮아져 이중고를 겪고 있다. 신약개발 비용이 급증한 제약도 고전하고 있다.
하지만 극복가능한 걸림돌이라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스위스인들은 과거 근면성실함과 독창적 해법으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스위스 시계제조업은 멸종의 경로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지만 스와치가 저렴한 시계는 더욱 대중적으로, 값비싼 시계는 더욱 희소하게 만들면서 위기를 극복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