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의 과학산책

과학책 읽기와 '엘도파 효과'

2022-09-06 12:07:35 게재
최준석 언론인·과학작가

얼마 전 대구에 있는 칠곡경북대학교병원 신경과의사를 취재했다. 파킨슨병 전문의인 이호원 교수는 이 병을 앓는 사람이 알츠하이머병 환자 만큼이나 많을 거라고 했다. 파킨슨병은 노인이 주로 걸리고, 손을 떨거나 움직임 장애가 있는 게 전형적인 증상이다.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 파킨슨병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킨슨병 원인은 중뇌의 흑질부에 있는 도파민 신경세포가 많이 죽기 때문이다. 도파민 신경세포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생산해 결과적으로 우리가 동작을 정확히 하거나 원하지 않는 동작을 하지 않도록 한다. 그런데 도파민 세포들이 많이 죽으면 동작을 조절하는데 애를 먹는다.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약으로는 엘도파가 있다. 엘도파를 먹으면 도파민이 공급돼 파킨슨병 증상이 완화된다. 엘도파는 1960년대에 나와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의 약으로 박수를 받았다. 아뿔싸, 그런데 기적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엘도파 효과가 약해지고 부작용이 나타났다. 그 기쁨과 아쉬움을 묘사한 영화가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스와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사랑의 기적'(1990년)이다.

파킨슨병 치료제 엘도파의 효과와 부작용

'사랑의 기적'을 수년 전에 봤다. 그럼에도 필자는 영화가 파킨슨병 환자(로버트 드니로 분)와 엘도파 혁명을 다룬 작품이라고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영화 '사랑의 기적' 관련 자료를 다시 찾아봤다. '사랑의 기적'은 미국 신경과 의사 얘기였다. 그의 이름은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으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다른 책 '깨어남'이 '사랑의 기적'의 원작이었다. 그동안 신경과 의사와 신경외과 의사가 하는 일도 구분하지 못한 필자는 그제서야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하는 일을 감 잡을 수 있었다.

이호원 칠곡경북대병원 교수 설명에 따르면 파킨슨병을 약으로 치료하려는 의사가 신경과 의사고, 신경외과 교수는 뇌 수술로 파킨슨병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한다.

영화나 책 속에 엘도파 효과가 잘 묘사되어 있다. 오랫동안 몸이 굳어 있었던 파킨슨병 환자(로버트 드니로)는 올리버 색스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정상인으로 돌아온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병원 문을 나서서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등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엘도파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 약해진다.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에 따르면, 약을 복용한 지 10년 쯤 지나면 뇌심부자극술(Deep Brain Stimulus, DBS)이라는 신경외과 수술을 받아야 한다. 뇌 깊숙한 부분에 전선을 넣고 전기적으로 자극해 중뇌의 흑질부에서 도파민이 생산되는 듯한 효과를 얻어내는 게 뇌심부자극술의 목적이다.

파킨슨병을 앓는 나이가 되지는 않았지만, 60대 중반을 향해가는 필자에게 '엘도파 효과'는 또다른 측면으로 다가왔다. 한시적으로 깨어남을 주는 엘도파 효과라는 게 필자의 과학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지난 3년간 필자는 '물리의 정석' 시리즈 세권 '고전역학' '양자역학' '특수상대성과 고전장론'을 읽었다. 미국 스탠퍼드대 끈이론 물리학자 레너드 서스킨드가 쓴 책들이다. 이 책들은 서스킨드 교수가 대학교 인근의 물리학을 좋아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학교 다닐 때 물리를 잘 하지도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으나, 다만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이 궁금했다.

이 책들을 보면서 뉴턴 이후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어떤 일을 했으며, 그들이 한 연구가 어떻게 양자물리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과,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어떻게 뉴턴과 다르게 설명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엘도파 효과 사라져도 한때 깨어난 기쁨은

당시 같이 공부했던 한 지인이 농반진반으로 필자에게 그랬다. 1년 쯤 지나면 공부한 내용을 다 잊어버릴 거라고. 시간이 지나 책을 열어보니 그의 말은 저주처럼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큰 윤곽은 기억나나 디테일에서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필자도 엘도파 효과가 사라지는 파킨슨병 환자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족한다. 자연과학이 인간과 우주에 대해 20세기와 21세기 초에 발견한 걸 맛보았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다. 엘도파 효과가 사라진다 해도 깊은 잠에서 한때 깨어나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최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