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안 남는 약물 성범죄 '악몽'
약물 성범죄 양성 한해 500건
"가중 처벌, 실태조사 관리해야 "
2020년 7월 A씨는 남자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그가 따라준 와인을 마신 뒤 의식을 잃었다. 그 사이 남자친구는 A씨를 성폭행하고 촬영까지 했다. A씨는 남자친구가 와인에 몰래 약물을 탔을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불법촬영과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약물이 검출되지 않는 데다 영상 속 A씨가 남자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등 의식이 있었다며 남자친구를 무혐의 처분했다.
8일 경찰과 마약예방단체 등에 따르면 2018년 버닝썬 사건을 통해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과 같은 불법 마약물을 이용한 성범죄가 알려지면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DFSA)는 행동과 인지력을 고의로 상실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약물을 먹인 후 강간 등을 저지른 범죄를 말한다. 이때 악용되는 약물이 '물뽕'이라 불리는 GHB와 케타민, 로히프놀 등이다. 최근에는 체내에서 GHB로 빠르게 전환되는 감마브티록란톤(GBL)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들 물질은 진정 수면 효과가 있는 향정신성약물로 무색무취로 술이나 음료에 타면 맛도 구분하기 어렵고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게 된다. 깨어나도 정신을 잃은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복용 후 1~4시간 내에 체내에서 분해돼 소변으로 배출된다.
경찰청은 2019년 8월 '성폭력 근절 업무 매뉴얼'을 개정하면서 GHB의 경우 "단시간 내에 체내에서 반출되며 무색무취한 특성 탓에 음료에 섞일 경우 식별이 어렵다"며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약물이 쓰였는지 우선 파악하고 약물 투여행위를 '폭행'으로 판단해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준강간'이 아닌 '강간' 혐의를 적용해 수사하도록" 했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는 피해 입증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실태조사도 되지 않아 정확한 피해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자료에 따른 약물에 의한 성범죄 피해를 의심해 감정한 사건은 2018년 1382건, 2019년 1979건, 2020년 1622건, 2021년 2538건 등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감정 결과 양성이 나온 건수는 2018년 359건 2019년 399건 2020년 420건 2021년 501건으로 20%대의 양성률을 보였다.
관세청의 GHB 등 신종마약류 단속실적은 2018년 171건에서 2019년 306건 2020년 333건 2021년 687건을 나타냈다.
임상현 마약중독치유센터 경기도다르크 센터장은 "예전에 물뽕을 많이 사용했는데 소문이 나고 알려지다 보니 이제는 비밀스럽게 사용해 표면적인 실태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유호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약물에 의한 성범죄 상담) 별도의 통계를 내지는 않지만 술에 의한 준강간 유형 중에 일부를 약물에 의한 피해로 의심하고 있고 이는 꾸준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 등이 문제가 되자 국회에서는 데이트 강간 약물 성범죄에 대한 실태조사와 통계를 구축해 정기적으로 점검하도록 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여성가족부가 성폭력 실태조사를 3년마다 실시하고 있지만 약물을 이용한 데이트 성폭력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말 대표 발의한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은 성폭력 조사 시 약물에 의한 성폭력을 포함하도록 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전윤정 국회 입법조사관은 '외국의 데이트강간 이용 성범죄 규제와 시사점 분석'에서 "약물을 사용한 성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법률을 정하고 DFSA 약물을 지정해 이들의 유통을 보다 엄격하게 규제, 처벌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데이트강간 약물 금지법 도입, 성폭력가중처벌 또는 마약류 특별 관리정책 등이 검토돼야 한다"고 밝혔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약물에 의한 성범죄는 증거가 남지 않는데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며 "약물에 의한 성폭행 처벌 규정을 신설하고 관련 통계도 만들어 당국이 들여다 보고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