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한이라는 블랙박스 열기
북한 공식매체의 분석은 밀과 왕겨를 분리하는 과정에 비유되곤 한다. 북한 매체의 상당 부분은 일상적인 선전이고 그 속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핵심적인 메시지와 패턴이 무의미한 선전, 장식화된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장식음을 걷어내고 메시지를 분별하는 것, 과거와 비교하고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적인 분석의 틀과 오랜 훈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일부 안보나 외교 전문가들은 북한 공식매체에 대한 분석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있다. 북한의 공개적 '말'은 허풍이 많고, 정말 중요한 것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 북한의 말처럼 실제는 그렇게 심오하거나 체계적이지 않다거나 대부분 과시적 위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저에는 북한의 '말'은 진실하지 않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본다면 이런 의견엔 동의하기 어렵다. 보통 북한의 공개된 메시지는 과장 과시 경고와 축소 은폐 생략 사이에서 북한 지도부가 직면한 상황과 기대를 교묘하게 드러낸다. 목적 없는 메시지는 없는 법이다. 다만 메시지를 드러내는 강약 정도 반복 변주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말과 행동은 함께 한다.
공개된 메시지에서 일관된 흐름 찾아야
대표적인 경우가 어떤 행동에 앞서 전조처럼 등장하는 용어나 정세 해석, 결정이다. 또는 행동 이후 이를 정당화하는 용어와 상황설명, 의미부여다.
공개적인 담화나 입장 표명이 단순히 엄포나 형식적 비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 북한의 행보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미장기전 정면투쟁 강대강투쟁 대적정신을 말뿐만 아니라 행동과 조치로 보여왔다. 2017년 화성-15형 ICBM 발사 직후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북한은 자신을 '전략국가'로 칭했다. 전략국가는 미국에게 실제적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한다. 북한은 그 위협을 실체화하기 위해 지금까지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2021년 1월 전술핵 개발을 선언하고 올해 들어 전술핵 실전화를 구체화하고 있다. 지극히 일관된 흐름이다. 과시적 허세, 장식음처럼 들리는 반복성 속에 패턴과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
2018년부터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주고받은 서신이 공개됐다. 당시 공식매체를 통해 공개했던 북한의 담화나 입장, 협상장에서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내가 담겨져 있다. 공개 메시지와 이면의 서신 사이에 큰 차가 없다. 오히려 북한이 이 둘을 상호보완적으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적인 절박함이나 좌절이 공개적인 담화에서는 거친 비난과 과장된 경고로 표출되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그 주장의 맥락이나 목적성이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권일수록 공식 메시지가 중요해지는 역설이 있다. 통제된 메시지일수록 통제 속에 의도가 반영돼 하나의 패턴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어나 맥락의 미세한 변화도 중요하다. 어떤 수준에서(level), 누구에게(audience), 언제(timing), 어떻게(frame), 어떤 톤(tone)으로 메시지를 구사할지 정교하게 조정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 담긴 패턴 변주 의미체계 행동을 읽어 내는 것이 곧 그 의도에 접근하는 중요한 경로다.
가령 '전략국가'라는 용어의 의미 변화를 쫓다보면 북한 지도부의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기술적 과시에 대한 강박적 태도, 미국 태도에 대한 민감함, 현상변경에 대한 조급함, 핵무기에 대한 과도한 몰입, 핵 능력에 대한 성과주의 압박이다.
'전략국가' 용어에서 북 지도부 불안감 읽혀
이렇게 보면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는 하나의 일관된 전략적 의도와 매끄러운 과정으로만 보기 힘들다. 기술적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법적 사회적 차원의 다기한 과정이 혼재돼 있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에 직면해 임기응변과 전술적 대응, 실패와 변경, 수정과 우회 등이 이뤄지는 과정들이다.
북한의 핵무기라는 매끄럽게 상식화된 블랙박스를 열면, 매우 다층적이고 복잡한 과정들의 실제들(realities)을 발견할 수 있다.
전략국가 용어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데, 우린 과연 지금 북한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31일부터 한미 군용기 240여 대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이 시작됐다. 그 전에 보냈던 북한의 메시지를 다시 들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