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동법 취지 망각한 근로시간 유연화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늘어나던 19세기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본가의 탐욕은 6세 미만 어린아이들까지 하루 16시간 노동으로 내몰았다.
노동법이 하루 노동시간 상한을 정해 기업을 규제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때부터다. 이처럼 노동법은 인간의 탐욕을 제어해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근로시간 상한제 폐지 나선 정부
그러나 윤석열정부의 노동개혁 방안을 연구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연구회)는 이런 노동법의 취지를 망각한 것 같다. 연구회가 12일 권고문 형식으로 발표한 근로시간 개혁과제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연구회가 많은 분량을 할애해 우선 개혁과제로 발표한 핵심 내용은 '근로시간 유연화'다.
윤석열정부는 연구회의 권고안에 공감하며 1주 52시간 상한 근로시간제 폐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장관은 "한자 한자 곱씹어 읽으며 먹먹한 심정이었다"라고 공감을 표시했다. 22일에는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올해로 끝나는 3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던 특별연장근로를 더 늘릴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달라고 국회에 촉구했다.
정부의 근로시간 유연화 방침은 두가지 면에서 퇴행적이다. 먼저 근로시간 유연화 방침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노동법의 핵심 목적과 배치된다.
가전제품 제조기업이 계절적 수요에 따라 필요한 경우 1년을 단위로 연장근로를 관리한다 가정하자. 연구회 권고안에 따르면 1주 최대 69시간 근로할 수 있고 1년간 연장근로 상한은 440시간이므로 최장 15주(440시간÷29시간) 동안 연속으로 69시간씩 일을 시킬 수 있다. 이는 정부가 뇌혈관 및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만성 과로 기준을 초과하는 노동강도다. 탄성한계에 해당하는 산재 인정기준을 넘어서는 근로시간을 허용하면서 노동개혁이라 부른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현장 노동자 의견 반영 안된 일방적 권고
근로시간 유연화 방침의 또 다른 문제는 재벌 경제단체의 이익만 편향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올해 초 매출 상위 500대 기업의 인사 노무 관리자를 대상으로 윤석열정부의 노동공약에 대한 의견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새정부가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노동현안으로 '근로시간 유연화'(27.9%)를 꼽았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6월 '근로시간 유연화를 위한 제도개선 건의서'를 만들었다.
핵심 내용은 근로시간 정산 기간의 자율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현행 6개월에서 1년으로 확대, 유연근로제 시행 시 근로자대표 합의 요건 완화 등이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소속 사업장 노동조합 조합원 26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유연근무제 확대 등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80% 이상은 "노동자의 자율적 선택권보다 노동시간에 대한 사용자의 재량권을 확대할 우려가 크다"라고 답했다.
노동법의 기본 목적을 망각하고 노사 이해당사자 중 일방에 치우친 근로시간 유연화 권고는 시급히 철회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