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서민 삶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세사기
50대 여성 박 모씨는 항상 도움을 주는 친구 지인 이웃이었다. 게다가 서울주택도시공사(SH)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협력업체 대표이기도 했다. 그는 이사를 앞둔 지인들에게 SH와 LH가 주거 취약계층을 위해 시행 중인 주택임대제도를 활용해 저렴한 가격에 전세매물을 소개해줬다.
하지만 은인인 줄 알았던 박씨는 사실 '전세둔갑술'을 부린 사기꾼이었다. 사전에 임대인과 월세계약을 체결하고 피해자에게는 위조한 전세임대차 계약서로 속여 입주시킨 뒤 전세보증금을 받아 편취했던 것이다. 기존 주택임대제도 절차가 복잡하고 자격조건 심사가 까다로워 일반인들이 쉽게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했다.
이에 더해 주택임대사업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며 투자금까지 받아 가로챘다. 또 주변 공범들을 끌어들여 지하철역 인근 주상복합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실장' 등의 명함까지 만들어 피해자들을 속였다.
박씨의 사기행각이 드러난 것은 '진짜 집주인'이 밀린 월세를 받겠다며 피해자들을 찾아가면서부터다. 지난해 2월부터 서울 강동경찰서에는 피해자들의 고소장이 쏟아져 들어왔고, 대규모 사기사건임을 간파한 경찰은 고소사건들을 병합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이상거래 탐지되는 시스템 구축 제안
그 결과 박씨와 공범들의 혐의를 입증해 검찰에 송치했다. 박씨로부터 사기당한 이들의 피해액은 총 120여억원. 적게는 1500만원에서 15억원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전 재산을 잃었을 뿐 아니라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고통스러운 건 박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찰에 송치된 이후 경찰서로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전세사기를 통해 큰 돈을 편취했지만 대부분 월세를 돌려막는데 썼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사기 규모에 스스로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피해자들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전세계약서를 작성할 때 임대인을 직접 만나 계약을 체결하고, 등기부등본에서 확인한 집주인 명의의 계좌로 전세보증금을 보냈다면 이번 사건과 같은 피해는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차인이 입주 후 주민센터에 신고해 확정일자를 받을 때 자동으로 국토교통부에 신고되고 임대인에게도 통보가 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확정일자가 임대인에게 통보되면 월세로 임대한 집이 전세로 변한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으니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강동서는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국토부와 LH 등 관련기관에 '이상거래탐지시스템' 구축을 제안했다. 동일인이 단기간 다수의 전월세 계약을 체결하거나 동일권역 내에서 월세계약 비율이 갑자기 증가하는 등 전세사기가 의심되는 경우 바로 탐지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다행히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전세사기 정보를 제공하는 '전세사기 예방센터'를 구축 중에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 근절되는 한해 되길
수사 중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피해자들의 진술조서를 받는 일이었다. 피해자들의 절절한 사연을 듣다보면 수사관의 마음도 아프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전세사기가 반드시 근절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