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줄이는 소비자 힘

"수리 정보,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표시 의무화"

2023-02-27 11:07:18 게재

'수리권' 도입 초읽기, 정보제공 강화 등 해결 과제 산적 … 부처 간 협업 강화해야 현장 혼선 줄인다

'수리권'(right to repair)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소비자들의 알 권리가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수리가 손쉬운 제품을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관련 내용 표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1일 이승진 한국소비자원 정책연구위원은 "선택권을 보장하고 소비자 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리권 제도 시행 전에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리권이란 아직까지 명확하게 정리된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한다. △수리 보증을 장기간 요청할 수 있는 권리 △수리 방식 및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수리에 필요한 부품 장비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수리가 용이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등 다양하다.

수리권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소비자들의 알권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1월 26일 서울 시내 대형마트 가전 매장에서 가전제품들을 살펴보는 시민의 모습. 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순환경제가 세계적 화두가 되면서 수리권이 부각됐고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12월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순환경제촉진법)이 통과됨에 따라 2025년 1월부터 시행된다. 순환경제촉진법 제20조에선 수리권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수입하는 자는 제품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위해 그 제품이 조기에 폐기되지 아니하고 수리돼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로 정의한다. 순환경제촉진법에서는 수리에 필요한 예비부품 확보에 중점을 뒀다.

◆전세계 전기폐기물 17.4%만 수집·재활용해 = 국제연합대학 국제연합훈련조사연구소 국제전기통신연합 등의 '글로벌 전자폐기물 모니터 2020: 수량, 흐름 그리고 순환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매년 스마트폰 100억개와 노트북 27억5000만개가 생산된다. 2019년 전세계에 버려진 전자폐기물은 약 5360만톤이다. 이는 5년 전에 비해 21% 증가한 수치다. 게다가 국회입법조사처의 '미국의 전자기기 수리권 논의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전세계 전자폐기물 발생량은 연간 7400만톤으로 예측됐다.

문제는 매년 이렇게 전자폐기물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재활용 비중은 높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의 경우 전세계 전기폐기물 5360만톤 중 17.4%만이 수집·재활용됐다. 전자기기 수명이 짧을수록 환경 피해뿐만 아니라 새로 구매하는 전자기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비되는 자원과 배출되는 온실가스로 인한 문제도 커진다.

국회입법조사처의 '미국의 전자기기 수리권 논의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구온난화지수(GWP) 요소는 평균 28%다. 반면, 생산·유통·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구온난화지수 요소는 평균 72%에 달한다.

유럽연합(EU) 미국 등에서 자원고갈이나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제품 수명 연장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서는 2014년 사우스다코타주에서 '디지털 수리권법안'이 발의됐다. 최근에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소비자 수리권 보장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EU는 2020년 3월 11일 '신순환경제계획'(NCEAP)을 발표하면서 '소비자 참여' '지속가능한 소비 권리의 보장'을 핵심 사안으로 제시했다. 이는 재활용 등 폐기 후 관리에 중점을 둔 종전 순환경제계획에서 진일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프랑스는 특정 전자기기에 대해 '수리가능성 지수'를 표시하도록 했다. 영국은 2021년 7월부터 일부 전자기기에 대한 예비 부품을 7~10년 동안 제공하도록 하는 수리권법을 시행 중이다.

◆소비자 선택이 지속가능제품 활성화 = EU 미국 프랑스 등 각국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 수리권을 시행 중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비자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순환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또한 소비자들의 자율적이고 책임있는 소비가 없다면 지속가능한 제품을 활성화할 수 없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보 제공 강화가 필수다.

이 정책연구위원은 "제품 생산-소비-수리 등 각 단계별로 주무 부처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 간 협업이 필수"라며 "부품 관련 내용의 경우 소비자기본법에 따른 분쟁 해결 기준 내용과 상충될 우려가 있는 등 부처 간 사전 협의가 면밀히 이뤄져야 실제 법이 집행됐을 때 혼선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소비권과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조금은 강제성이 있는 수단도 필요하다"며 "수리에 관한 정보를 '중요한 표시·광고사항 고시'에 넣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표시·광고사항 고시는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선택하는데 필요한 정보 제공을 확대해 정보 부족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또한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20조 제1항 제1호의 규정에 따라 사업자가 표시·광고 내용에 이 고시에 따른 중요 정보를 포함하지 않을 경우 1억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한다.

이와 함께 소비자 수리권을 보장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기본권인 안전할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는 제품과 품목의 특성에 따라 고도의 수리 기술과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소비자의 자가 수리 및 부품의 공급을 제한하는 정책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영세사업자들은 제도 도입으로 어려울 수 있으므로 공동수리서비스센터를 만들어주거나 교육 지원 등 여러 인센티브를 함께 제공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제작 단계부터 수리 쉽도록 설계" = 21일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자원순환팀장은 "제작 단계부터 수리가 용이하도록 설계하는 게 중요하다"며 "지속가능한 제품을 만드는 걸 의무화할 수 있도록 법으로 강제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수리권이 법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에도 시민들이 수리를 했을 때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지 모니터링하고 추가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수리권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품이 고장이 난 뒤의 단계에서 고민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사업자는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수리가 쉽고 내구성이 뛰어나게 하고, 소비자는 구매 단계에서 어떤 제품이 수리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는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친 뒤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을 때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수리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순환경제가 달성될 수 있다는 소리다.

23일 환경부 관계자는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기업의 특허권, 디자인권과 소비자의 안전성이나 유해성 보장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균형감각있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제도가 제대로 안착될 수 있도록 공정거래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 등 다른 부처와 면밀히 논의를 진행해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순환경제 = 폐기로 끝나지 않고 다시 순환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다. 생산-유통-소비-재사용·재활용 등 모든 과정에서 자원 사용과 폐기물 발생을 원천적으로 줄이는 게 목표다. 나아가 사용된 자원을 경제체계 안에서 계속 이용하는, 지속가능한 경제체계를 추구한다. '자원채취-대량생산-폐기'로 끝나는 선형경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지구온난화지수 = 이산화탄소 메탄 오존 등 온난화를 초래하는 가스가 지구온난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측정하는 지수다. 이산화탄소 1kg과 비교할 때 특정 기체 1kg이 지구 온난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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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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