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반도체, 협력 생태계부터 챙기자
1984년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두 기관이 탄생한 시기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는 반도체 장비 제조 기업 ASML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벨기에 루벤에서는 나노기술 및 반도체 연구소 아이멕(IMEC)이 설립됐다. 얼마 전 유럽과의 국제기술협력 협의차 오른 출장길에 ASML과 IMEC을 함께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현지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반도체 강국이 되기 위해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을 꼽아볼 수 있었다.
첫째는 끊임없는 기술혁신이다. IMEC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파일럿 연구시설을 구축해놓고 기업들과 기술협력을 진행한다. 매년 기술포럼(IFT)을 개최해 연구 중인 성과와 업데이트한 기술 로드맵을 공개하면서 관련 업계를 선도해 나간다.
특히 IMEC은 실생활이나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실용적 연구에 집중하는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설계나 시제품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고 공동 연구개발 과제를 수행해 얻는 수익은 연구소 전체 연간 예산 중 70%나 된다.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3가지 요건
둘째는 훌륭한 인재 확보다. IMEC에는 현재 9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온 연구자 4500명 이상이 함께 모여 일한다. 외국 출신 엔지니어에게는 따로 이주 비용을 지원하며 특별 세제혜택을 제공한다. 글로벌 인턴십이나 해외 대학과의 공동 학위과정도 운영한다. 고급 브레인 유치를 위해 각별히 공들이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도 산업을 키우려면 인재가 충분히 공급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기술진흥원은 올해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첨단전략산업 분야 인재를 8600여명 정도 양성할 계획이다.
반도체특성화대학원 지정과 운영에는 570억원, 단기 집중교육 과정인 인재양성 부트캠프 신설에는 150억원을 투입한다. 해외 우수 인재 확보나 장기근속 유지에 필요한 지원책도 구체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셋째는 협력적 생태계 조성이다. IMEC은 기업과 대학을 포함해 약 1000여곳의 기관과 협업하면서 탄탄한 연구 생태계를 만들어 나간다. 기업들과 밀착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학계와 산업현장을 이어주는 중간자적 위치에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물론 IMEC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파트너십을 진행하는 데는 연구소로서 제한적인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적 이유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IMEC이 협력의 메커니즘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은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대학, 연구소가 구심점이 되는 열린 협업이 활발해지길 바란다. 협업이 부진한 생태계에서는 파운드리나 팹리스 등 다양한 플레이어가 성장하기 어렵다.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그저 인내심과 애정을 갖고 기술과 인재에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 혁신적 기술과 좋은 인재를 끌어들일 만한 매력적이고 개방적인 협력의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부·기업 원팀으로 변화 이끌어내야
세계 반도체 1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아는 바를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진짜 변화가 필요하다. 앞으로 정부와 기업이 원팀으로 움직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