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굿바이, 리커창!!

2023-04-06 12:08:46 게재
최필수 세종대 부교수 국제학부

지난 3월, 인민대표대회 업무보고를 마지막으로 리커창(李克强)의 소임이 끝났다. 그는 일찍부터 출세길에 올랐다. 38세에 장관급인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에 올랐고 44세에 최연소 성장(省長)이 됐다. 그러나 소년등과의 뉘앙스 - 너무 일찍 출세하면 좋지 않다 - 가 그러하듯 그의 마지막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된 데는 시대의 탓이 컸다. 그는 후진타오의 롤모델을 따라갔지만 후를 배출한 시대는 지나갔다. 후진타오는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인 1인자의 자리에 오르기 10년 전인 14차 당대회 때 이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그는 선배들의 눈치는 볼지언정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었던 매우 안정적인 황태자였다.

그러나 리커창은 달랐다. 그와 시진핑은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인 최고 자리에 오르기 불과 5년 전까지 누구의 서열이 높은지 경쟁하는 사이였다. 결국 원로들의 타협을 통해 시진핑-리커창 체제가 출범했지만 내부 역학은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흔히 잊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원자바오 서열이 3위였다는 사실이다. 2위는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이었다.

원자바오는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되는 실무형 총리였고 더 큰 자리를 욕심낼 필요도, 남에게 견제받을 필요도 없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진핑-리커창 사이는 매우 달랐다. 경쟁을 거쳐 1, 2위를 부여받은 두 사람은 그 순서대로 권좌에 오른 후에도 결코 편안한 사이가 되지 못했다.

거시경제 관리 실패가 가장 중요한 요인

리커창이 고단한 처지에 있었던 데는 자신의 탓도 있었다.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데 있어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커창은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답게 중국의 경제체제를 이론적 정합성을 지닌 자유주의 체제로 이행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노력은 2013년 제18기 3중전회에서 엿보인다. 새로 출범한 지도부의 비전이 담겨 있는 '전면 개혁심화를 위한 중대 문제에 관한 결정'에 "위안화 자본항목 자유태환을 조속히 실현한다"는 깜짝 놀랄 문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1996년에 경상계정에 대한 자유태환은 실시했지만 아직 자본계정 전체에 대한 본격적인 자유태환은 실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개방 수준을 가늠하는, 나아가 한 나라가 자유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나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일반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국가 비전에 이러한 항목을 관철시킨 리커창은 새로 지정된 상하이 자유무역시범구에서 자본계정 개방을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관료들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이미 이런 항명의 소식이 공공연히 알려진다는 것부터가 총리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결정적인 타격은 2015년에 있었다. 그해 봄 중국정부는 '중국제조2025'와 '인터넷 플러스'와 같은 장밋빛 산업정책들을 연달아 발표했다. 이를 호재로 받아들인 증시는 폭등했지만 오래지 않아 상승폭을 그대로 반납하는 하락장이 이어졌다. 이렇게 중국의 금융이 불안하다고 여겨지던 8월에 환율공시제도 개혁이 있었다. 이를 외화유출 통제 조짐이라고 인식한 민간기업들은 급속도로 위안화를 처분하고 달러를 취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불과 몇개월 사이에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4조달러에서 3조달러로 감소했다. 시진핑 지도부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만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누가 관리했으며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리커창이었다. 자본계정이 열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외화 1조달러가 증발했는데, 만약 열려 있었더라면 어떡할 뻔 했는가? 누가 열자고 했는가? 역시 리커창이었다. 이 사건 후로 자본계정 개방논의는 중국 정책담론에서 사라졌고 선별적 금융시장만을 개방하고 있을 뿐이다.

리커창의 길이 중국 위한 길인지는 의문

이 두가지 요인, 시진핑과의 태생적 긴장관계와 2015년 거시경제 관리의 실패가 그 후 리커창의 위상을 결정지웠다. 시진핑의 권력독점을 비판하는 언론들은 리커창을 중국이 갔어야만 하는 길의 상징처럼 형상화하고 아쉬워하지만, 그러한 아쉬움은 절반만 맞다.

리커창이 좀 더 적극적인 시장론자이고 중국이 그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길이 과연 중국을 위한 길이었을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어쨌든 중국이 갔었을지도 모를 그 길과 함께 리커창은 떠났다. 굿바이, 리커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