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막걸리의 변신은 무죄

2023-05-02 11:51:37 게재
김기명 전 호남대 교수, 식품공학

대학을 입학하고 막걸리를 학과 신입생 환영회 사발식 때 대접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당시 막걸리병은 스크루형 뚜껑이 아니라 막걸리병 목 부분을 꾹 누르면 뚜껑이 열리는 형태였다. 이 부실한 포장의 이유는 유통과정 중 후발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밀봉을 완벽하게 하면 팽창으로 병이 폭발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막걸리는 다른 주류에 비해 발전이 늦었고 외국으로 수출은 고사하고 한 지역의 막걸리가 전국으로 유통되는 것조차 무리였다.

알코올 발효는 산소가 별로 없는 환경 속에서 포도당 한 분자가 각각 두 분자의 알코올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ATP가 생성되는 과정이다. 이 알코올을 만드는 미생물들은 다채롭긴 하지만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알코올 생산을 담당한 것은 효모다. 빵 술 에탄올연료 등 알코올과 관련이 있는 모든 곳에 효모, 특히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Saccharomyces cerevisiae)'가 같이 한다.

더운 여름날 뚜껑을 타고 거품을 내며 줄줄 흐르는 막걸리의 후발효를 일으키는 것은 아직도 왕성하게 살아있는 효모 때문이다. 과연 막걸리를 장기보관해도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이 프로젝트는 학위의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

막걸리 연구의 수난사

효모를 후발효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거하거나 사멸시키는 여러가지 살균방법이 있어도 가장 저렴하고 일반적인 것은 열 살균이다. 막걸리 탱크에 펌프와 스테인리스 코일을 연결하고 뜨거운 수조를 단시간에 통과를 시키고 보니 꽤 그럴싸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겨우 어렵게 뽑아낸 살균 막걸리는 더 이상의 후발효는 없었다. 당연하다. 열에 의해 균이 모두 사멸했으니.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맛이다. 연구원 모두 모여 살균된 막걸리를 시음했다. 결과는 "도저히 못 마시겠다"였다. 표현할 수 없는 쿰쿰한 냄새와 걸쭉한 점성과 갈색으로 변색한 막걸리는 먹을 수 없는 신제품이었다. 특히 이 냄새를 화덕냄새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막걸리의 소재인 전분이 과열 때문에 생성된 불쾌한 냄새였다.

더구나 뜨거운 상태로 토출된 막걸리는 알코올과 특유의 향기와 탄산이 높은 온도 때문에 공기 중으로 휘발되어 버렸다. 이번에는 열처리 이후 급속 냉각 시스템을 부착했다. 단순한 처방이었지만 알코올과 향기 성분은 낮은 온도로 응결되어 다시 열처리 막걸리 안으로 스며들었고 생막걸리보다 맛이 떨어져도 가망이 보였다. 그러나 색이 문제였다. 베이지와 우유를 섞은 듯한 생막걸리에 비해 갈변된 색은 역시나 과도한 열처리 시간 때문이었다. 어떻게 열처리 시간을 정할 것인가?

식품의 열처리 방식에는 멸균, 살균방식이 있다. 멸균은 유·무익을 따지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균을 열로 사멸시키는 것이다. 대부분 우유는 멸균 시스템이다. 살균은 특정 미생물만을 열로 사멸시키는 것이다.

후발효를 일으키는 이 효모만 잡으면 과도한 열을 투입하지 않아도 됐다. 막걸리의 효모만 따로 분리해서 대량 배양해 이 효모의 내열적 특성들을 수리화했다. 열처리로 생명체의 사멸되는 정도가 활성화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초기의 균수가 몇도에서 얼마간 처리하면 몇마리가 남는가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결국 적절한 온도에서 단 몇초의 가열시간으로 살균효과를 볼 수 있는 공정이 탄생했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막걸리 회사는 테트라 팩, 캔 막걸리, 돌려 따는 병뚜껑으로 완전히 밀봉포장된 막걸리와 약주를 생산함으로써 전국 유통을 넘어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막걸리는 살균공정을 도입함으로써 상품성의 큰 도약이 이뤄졌다. 가장 기본적인 유통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통의 물꼬를 트고, 광역 수준의 유통과 지역특산물이 첨가된 지역유통 등 이원화가 이뤄지면서 막걸리는 새로운 산업의 장을 열게 되었다.

실험실에서 산업화된 식품으로

당시 막걸리를 실험실로 끌어들인 연구가 많지 않았다. 한참 유전공학이라는 선풍적 신생 학문에 물타기 하기 바빴고 결국 천연자원에 대한 기능성 실험들만 밀물처럼 학회지의 90% 이상을 채웠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에 한식 세계화에 막걸리 브랜드화 선풍이 불 때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막걸리 전문가들이 매체에 등장했다. 지금은 민중과 친구처럼 지내온 막걸리가 당당하게 산업화한 식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막걸리를 위해 건배. "지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