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공간에 대한 기억과 해마의 역할
5월은 여름의 초입이다. 코로나가 걷히고 있는 거리에는 따뜻한 낮과 선선한 저녁 날씨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있어 가족행사가 많고 근로자의 날과 스승의 날이 있어 사회 공동체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5월을 가정의 달로 부르는 이유는 5월 15일이 ‘세계 가정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기념하고자 하는 가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 각자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다른 감정으로 가족과 가정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소중한 의미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존재로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상황들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 소중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편하지만 애틋한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은 가족관계에서 쌓인 기억들에 의존한다.
가정은 우리에게 생애초기 기억을 만들어준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선물하기 위해 해마다 5월이면 어린이날을 기념한다. 또 기억이 흩어지는 시기를 함께 견디기도 한다. 철이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힘들었던 시절은 잊고 좋은 기억만 남기라고 어버이날을 챙긴다.
생물종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기억
인간을 비롯한 생물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며,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억은 공간에 대한 기억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게 될 때 중얼거리는 “여긴 어디, 나는 누구”와 같은 표현들이 장소와 공간에 대한 지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나타낸다. 노화에 따른 주요 인지장애인 치매증세를 확인할 때 주요 항목으로 공간지각 능력이 고려된다.
공간지각은 외부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능력이며, 공간기억은 목표장소를 가는 경로를 계획하고, 물체의 위치와 사건의 발생을 기억하고 인출하는데 관여한다. 우리 뇌에서 해마(hippocampus)는 기억을 관장하는 뇌 영역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바다에 사는 해마와 생김이 비슷해 이름 그대로 해마라는 명칭을 뇌 영역에 쓰게 됐다. 바다에 사는 해마는 말의 머리와 생김이 비슷하여 해마(海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해마는 우리 뇌의 좌우 측두엽의 안쪽에 위치하며 특히 우리를 둘러싼 환경 내 위치에 대한 기억과 맥락에 대한 기억, 자서전적인 기억을 처리하는 과정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2000년 영국의 인지신경과학자 엘리너 맥과이어는 공간 지각과 해마의 관련성을 연구하기 위해 런던 택시운전사의 해마 크기를 조사했다. 런던에서 택시면허를 취득하고 복잡한 런던시내를 운전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해마 뒷부분의 크기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택시운전 경력이 오래될수록 해마의 부피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결과는 환경에 대한 공간적 표상을 저장하고 탐색하는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경우 후측 해마가 지역적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비록 택시 경력 전후의 뇌영역을 측정해 비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환경적 요구에 따라 뇌가 국소적으로 가소성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연구자들은 2006년에 버스운전사와 택시운전사의 해마를 비교했다. 운전 경험과 스트레스 정도가 유사하게 매칭된 버스운전사와 택시운전사의 차이는 제한된 경로를 따르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버스운전사는 주어진 경로를 잘 따르는 임무를 수행하는 반면, 택시운전사는 승객의 요청에 따라 경로와 위치를 탐색해 임무를 수행한다. 앞선 연구와 일관되게 택시운전사의 후측 해마 부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택시운전사의 경우에만 내비게이션 경험이 많을수록 후측 해마 부피가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자들은 2008년에 관련 결과를 추가로 보고했는데, 해마의 부피가 비공간적 전문성과도 관련이 있는지 살펴본 연구였다. 연구의 배경은 숙련된 택시운전사에서 후측 해마의 부피가 큰 이유가 공간적 경험의 축적이 아닌 단순한 전문성의 축적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었다.
수년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의사그룹과 고등교육 이상을 받지 않았으나 의사그룹과 지능지수가 일치하는 대조군을 비교했을 때 두 군의 해마를 포함한 전체 뇌의 회백질 부피의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20여년의 의료 경험 역시 뇌 부피와 별다른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련의 연구들은 후방 해마가 복잡하고 정교한 대규모 공간정보를 습득하고 처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뇌 속 GPS 기능을 하는 해마의 장소·격자세포
공간에 대한 표상과 기억이 해마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기전은 아니다. 2014년 노벨생리의학상은 해마에 존재하는 장소세포(place cell)와 해마에 인접한 내후각피질의 격자세포(grid cell)를 발견한 뇌신경과학자인 존 오키프와 모세르 부부에게 수여됐다. 장소세포가 현재의 위치를 기억하는데 기여를 한다면, 격자세포는 육각형의 패턴으로 발화하면서 전체 공간에서 내가 있는 현재 위치를 파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노벨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을 뇌 속 GPS라고 부르며 두 신경세포의 협응이 고차인지기능을 가능하게 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각각의 세포들이 적절한 연결을 통해 놀라운 기능을 발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와 둘러싼 환경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며 스스로 존재감을 찾는다면 당장 뇌 부피가 커지고 기능이 발현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은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