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태국 연합정치의 딜레마 - 총리 선출
총선 압승에도 불구하고 야당들의 집권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총선으로부터 3주가 지난 지금 제1당으로 부상한 까우끌라이당(행동전진당)을 중심으로 집권연합 구성 논의와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성
공을 예측하는 여론은 그 반대 여론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30% 대 70%).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낳은 태국 총선이 끝난 지 한달이 다 되어 가는데 차기 정부 구성과 총리 선출이 언제 있을지 감감하다. 국회의원을 뽑는 진짜 총선(general election)은 끝났지만, 상하원의원들이 새 정부를 이끌 '총리를 선출'하는 총선은 한두달 더 기다려야 윤곽이 보일 듯하다.
진짜인 첫번째 총선은 유권자 1인이 2표씩을 갖고 한표는 1인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에게, 다른 한표는 비례대표명부를 제출한 정당에 투표하는 단순다수제-비례대표제 병립형 선거제도라서 다른 변수가 작용할 여지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도 별로 없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태국 정치에 숨어 있는 모든 문제점들은 간접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바로 이 두번째 '총선' 즉 총리선출과 정부구성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총선 한달 후에도 총리선출은 오리무중
일반적으로 의회제 민주국가에서 총리는 의석 과반을 차지한 집권당의 당수 또는 대표가 거의 자동적으로 선출된다. 한 정당이 과반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다른 정당(들)과 연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정책과 장관직을 둘러싼 협상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대체로 총선에서 최대의석을 차지한 제1당에서 총리가 선출되고 제1당을 중심이 된 최소승리연합이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흥정과 타협에 능한 동남아에서 총리나 집권연합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이런 연합정치(연립정치, coalition politics)의 일반적 원칙이나 경향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통령제인 인도네시아는 대선이 끝나면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정당들이 여당과 협력해 최대집권연합(현재 총의석수 비율 82%)을 형성하는 패턴이 굳어지고 있다. 의회제 국가 말레이시아도 여당연합에 가담한 정당들의 총의석수 비율이 70%에 이른다. 미국형 대통령제의 오랜 전통을 가진 필리핀은 의원들의 당적 변경에 제도적 윤리적 장애가 없어 대선이 끝나면 대통령이 속한 정당으로 의원들이 몰려든다.
군부독재와 선거권위주의 사이를 왕복해 온 태국은 최대집권연합을 형성하는 인접 동남아국가와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14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쁘라윳(Prayut Chan-o-cha)은 국내외 여론의 압력 때문에 2017년 마지못해 개헌을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실권하지 않을 총리선출과 내각구성 방법을 새 헌법에 못박았다. 총리 선출을 상하원의원 750명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하되, 직접선거를 통해 500명을 선출하는 하원과 달리 상원 250명 전원을 군부가 임명하는 독재 헌법을 만들었다.
250명 선을 확보한 군부는 하원의석의 25%인 125명에다 1명만 더 지지를 받으면 총 750명의 과반을 얻어 정부와 총리직을 장악할 수 있다. 반면 야당(들)은 하원선거에서 75% 의석을 차지해도 과반에 못미쳐 집권할 수 없다. 탁씬 친나왓이 처음으로 집권한 2001년 이후 실시된 모든 총선에서 단 한번도 제1당 자리를 빼앗지 못한 친군부 정당을 집권하게 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억지제도를 만든 것이다.
2001년부터 2014년 사이 실시되거나 계획된 여섯차례 총선은 헌법재판소에 의한 무효결정, 선거위원회에 의한 당선무효결정, 반탁신 세력과 정당들의 선거 보이콧, 심지어는 두차례의 군사쿠데타 등 무리한 수단을 동원한 군부와 친군부세력, 국가기관에 의해 무력화되었는데 2017년부터는 아예 헌법으로써 야당의 집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동안 팔랑쁘라차랏당(국민국가권력당)을 창당하고 여론조사를 통해 최적기를 탐색하던 쁘라윳 총리는 2019년 3월 드디어 총선을 실시했지만 이번에도 탁신계 야당 프아타이당(태국을위하여당)으로부터 제1당 자리를 빼앗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로 문제의 2017년 헌법에 따라 제1당 프아타이당이 아닌, 제2당 팔랑쁘라차랏당이 상원의 지지를 통째로 받고 친군부 왕당파정당까지 규합해 '압도적인' 표차로 쁘라윳을 총리로 재등극시켰다.
친군부세력의 의도 무력화 시킨 총선
그러나 태국의 민주화 세력, 야당, 유권자들은 용감하고 현명했다. 비록 상원의원 임명제를 포함한 독소조항 개헌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왕실모독죄 철폐, 왕실개혁, 징집제도 개선, 최저임금제 실시 등을 포함한 개혁적 쟁점들을 끈질기게 제기하며 세대별 계층별 지역별로 개발된 맞춤공약과 전략을 앞세워 도시인들과 젊은 세대들을 야당 기치 아래 집결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4년 간의 인고의 노력은 지난 5월 14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예상을 뒤집은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야당들의 대승과 여당연합의 참패였다.
가장 진보적이고 반군부 정당인 까우끌라이당(행동전진당)이 500석 중 151석을 얻어 제1당으로 부상했고, 지난 20여년간 제1야당 지위를 굳건히 지켜왔던 친탁신계 정당인 프아타이당은 10석 뒤진 141석을 차지했다. 양대 야당은 292석을 얻어 4년 전보다 75석이나 더 늘렸다. 야당계열 모든 정당들은 313석(63%)과 비례대표 득표율 70%를 기록, 총 의석수에서 171석(34%)과 비례대표선거에서 20% 득표에 그친 여당계열 친군부 정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런 압승에도 불구하고 야당들의 집권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총선으로부터 3주가 지난 지금 제1당으로 부상한 행동전진당을 중심으로 집권연합 구성 논의와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성공을 예측하는 여론은 반대 여론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30% 대 70%).
어떤 조합이 집권연합으로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필자가 동남아정치 분석을 위해 제시한 '리더십' '정치과정(선거)' '정치문화'라는 독립변수가 세가지나 들어간 3차방정식만큼 난해하다. 민주화를 열망하며 가슴을 졸이는 태국 국민들에게는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앞으로 총리가 선출되는 날까지 한두달은 이 방정식을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다양한 변수 존재하는 집권 시나리오
태국정치 전문가들과 언론이 예상하는 몇가지 시나리오를 보자. 첫째는 현재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민주적 상황이라면 비교적 쉽게 타결되었을 제1당 까우끌라이당이 중심이 되고 제2당 푸아타이당이 파트너가 되는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집권연합이다. 이 조합의 최대 장애물은 왕실개혁에 반대하는 군부와 국가기관들이며, 총리선출에서 과반 득표를 위해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지만 쉽게 응하지 않을 품짜이타이당(태국프라이드당)의 반개혁적 성향이다. 또한 이 집권연합으로 세워질 정부는 오래 가지 못하고 군사적이거나 사법적인 쿠데타로 최후를 맞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둘째로 정반대의 조합도 수학적 제도적으로는 가능하다. 즉 현 집권연합, 즉 친군부 정당들이 모두 연합하고 상원 250명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총리를 만들고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선거인단 420여명을 확보해 절반(375명)을 넘겨서 '집권'에는 성공할 수 있으나 겨우 35%의 하원의석으로 '통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쁘라윳 총리 하의 태국이 당면한 정치적 위기 상황보다 훨씬 더 악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품짜이타이당이 이 위기의 연합정권에 가담할지도 미지수다.
마지막 남은 시나리오가 지금으로서는 실현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그것은 제1당 까우끌라이당은 집권연합에서 배제되고, 대신 제2당 프아타이당이 중심이 되어 친군부정당과 연합해 군부가 만든 상원의원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양측의 중간에 있는 품짜이타이당도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하원에서 300석 가까이 확보해 비교적 안정적인 국정운영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탁신-군부 집권연합이 이루어진다면 태국정치의 민주화는 더욱 요원해지고, 정치적 의식이 높아진 젊은 유권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프아타이당의 미래도 그만큼 어두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