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m 호암산 정상에 신라시대 우물 있었다
금천구 호암산성, 행정·군사중심
삼국~조선 역사 엮어 관광자원화
지난 1일 오후 서울 금천구 시흥동 호암산 정상. 가파른 산길을 30분 가량 올라왔는데도 주민들은 지친 기색이 없다. 100여명이 훌쩍 넘는 주민들이 문화재 전문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호암산성 내 두번째 우물터 발굴 현장, 스물여덟 청년 금천구 역사가 기원 6~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간이다. 유성훈 구청장은 "주민들 다수가 유년기부터 뛰놀던 뒷동산이 신라시대부터 행정적·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8일 금천구에 따르면 해발 347m 호암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호암산성은 신라시대부터 현재의 서울 서남부권 일대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했던 시기에 둘레 1547m, 면적 6만8689㎡ 규모로 쌓은 산성이다.
1989~1990년 1차 조사에서 조선시대 석축 아래 통일신라시대 석축을 확인했고 현재 한우물로 불리는 우물터를 발굴, 정비했다. 과거 군사적 거점이자 행정관서 역할을 했던 점을 확인, 이후 토지 매입과 탐방로 정비 등을 진행하며 종합정비 계획을 마련했다.
올해는 335m 높이에 가로 세로 각각 10m와 13m로 조성된 두번째 우물터를 발굴했다. 내·외벽과 담장기초 건물터까지 확인했고 청자 백자 접시 벼루 수막새 청동숟가락 등 신라시대부터 조선 중기에 걸친 것으로 파악되는 유물을 여러점 찾아냈다. 연구진은 특히 연꽃이 음각된 암키와에 주목하고 있다.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연꽃과 유사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금천구는 지난달에 이어 이달까지 두차례 현장설명회를 열고 제2 우물지 발굴조사 성과를 주민들과 공유했다. 발굴 작업에 참여한 조사원들이 직접 유적의 의미와 출토된 유물에 대한 설명을 들려줬다. 이웃과 함께 호암산성지킴이단을 꾸린 이상준(65·시흥동)씨는 "뒤늦게나마 사적으로 지정돼 다행인데 그동안 역사적인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며 "이번 발굴을 계기로 아차산성이나 행주산성 정도 위상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해 가을부터는 우물터 옆에 있는 남측과 북측 건물터를 발굴하고 2034년까지는 성벽 등을 복원·정비하게 된다. 금천구는 우물터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힌 '호암산성 역사문화길' 조성을 시작으로 일대를 관광자원화 한다는 계획이다. 호암산성 전체를 역사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교통약자까지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일 방안도 구상 중이다.
지역 곳곳에 흩어진 역사문화 자원도 아우른다. 한양을 위협하던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했다는 호압사(虎壓寺),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던 길에 하루 묵으며 백성들과 소통했던 시흥행궁 터, 옛 금천관아 조경수로 추정되는 800살 넘은 은행나무 등이다.
시흥행궁 터 인근에 시흥행궁전시관을 마련해 교육공간으로 활용 중이고 서울시 경기도 등과 함께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를 하고 있다. 호암산성과 호압사 석불좌상을 활용한 교육 공연 전시 등도 있다. 내년에는 학술대회를 열어 호암산성의 의미를 재조명할 계획이다.
유성훈 금천구청장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천구 옛 역사를 아울러 주민들 관심과 자긍심에 화답할 것"이라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정비해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행정 중심지였던 금천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