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가 함께 위험요인 해소

'죽음의 공장' HD현대중공업 '중대재해 0' 도전

2023-06-09 11:01:29 게재

원·하청 함께 위험요인 발굴·해소, 1년간 사망사고 0건 … 하청노조 "산업안전보건위 노조 참여 보장" 촉구

"새벽에 비가와서 상당히 미끄럽죠. 오늘 근무할 때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발표해주실 분 계십니까?"

지난달 26일 울산시 동구 HD현대중공업 야외작업장(야드)에서 건조 중인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앞. HD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 금영산업 유인규 팀장과 팀원 10여명이 둥글게 모이더니 "표준작업 준수하자"를 외쳤다.

도장 전처리 작업에 들어가기 전 안전점검회의(TBM, Tool Box Meeting) 모습이다. 안전모 보호안경 방진마스크 안전벨트 등 안전장비 점검을 마친 유 팀장이 팀원들에게 각자가 파악한 위험요소에 대해 물었다.

"블록에 수직사다리가 상당히 많이 설치돼 있습니다. 수직사다리는 오르내릴 때 미끄러워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반드시 안전벨트를 활용해 안전하게 작업하면 좋겠습니다."

"바닥을 보시면 론지(선박 보강재) 높이가 최소 80㎝입니다. 송기 마스크를 쓰면 시야가 좁아지잖아요. 이동할 때 걸려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이런 의견을 나누며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현장 위험성 평가를 마친 뒤 일터로 향했다.

지난달 26일 울산시 동구 HD현대중공업 야외작업장(야드)에서 건조 중인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앞. HD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 금영산업의 팀장과 팀원 10여명이 둥글게 모여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를 열고 현장 위험성 평가를 하고 있다. 사진 한남진


위험성 평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요인을 스스로 파악해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자기규율 예방 및 엄중 책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핵심 수단이다.

고용부는 지난 5월 22일 '사업장 위험성 평가에 관한 지침'(고시) 개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개정 고시는 그동안 위험성 평가를 잘 몰라서 주저하던 중소규모 사업장 노사가 사업장안의 위험을 찾아 재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손쉽고 간편한 체크리스트법, 핵심 요인 기술법 등의 위험성 평가 방법들을 담았다.

위험성 빈도와 강도를 정량적으로 계산하지 않고도 위험성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위험성 평가를 충실히 수행한 기업에서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노력한 사항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고려된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도크 전경. 사진 현대중공업 제공


◆중량물·고소작업·하청구조 위험요인 산재 = 조선업 작업현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중량물 작업 △선박 건조가 진행될수록 늘어나는 밀폐공간 내 작업 △고소(높은 곳)·화기(용접 등 불을 쓰는) 작업 △높은 하청·외국인 노동자 비율 등 각종 위험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위험성 평가를 철저히 수행하는 모범 사업장으로 꼽힌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말 기준 1만50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이지만 최근 1년간 산재 사망사고가 단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HD현대중공업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에 따르면 1972년 창립한 이래 사고사망 450명, 과로사 47명 등 49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매년 9.94명 꼴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이 늘면서 '위험의 외주화'로 하청노동자 사고사망 비중이 높아졌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둔 지난해 1월 24일에는 조선2야드 가공소조립 공장에서 리모컨 크레인으로 적치작업 중이던 오 모씨(51)가 크레인과 지지부 사이에 끼어서 사망했다.

같은해 4월 2일에는 하청업체 노동자 김 모(53)씨가 현대중공업 조선소 패널2공장 3라인에서 본용접을 위해 철판을 자르고 가용접하는 취부작업을 하던 중 폭발사고로 숨졌다. 잦은 산재 사망사고로 현대중공업은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HD현대중공업은 같은해 3월 안전정책을 총괄하는 안전기획실과 현장 안전을 담당하는 각 사업부 안전조직을 통합해 '안전통합경영실'로 개편했다. 안전보건 예산도 올해 3085억원으로 지난해 2712억원보다 13.7% 증액했다.

2027년까지 △재해율 0.15 이하 △사망만인율 0.29 이하 △안전문화 지수 3.7 이상 달성 등 5년간 안전 목표·전략·추진사항을 담은 '비전 2027'도 마련했다.

한영석 HD현대중공업 부회장(대표이사)는 "안전 최우선 원칙을 기반으로 중대산업재해 근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며 "매 분기 안전경영위원회를 열고 안전·생산심의위원회를 수시로 개최해 '안전 최우선' 가치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HD현대중공업 내 안전 전담 인력은 490여명이다. 50인 이상 협력사는 전담 안전관리자를 1명 이상 의무적으로 선임하도록 했다. 안전관리자 선임 비용도 최대 2명에게 1인당 300만원을 지원한다. 원청 노조인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각 사업부 대의원들이 매일 1시간씩 안전보건활동을 하고 있다.

◆위험성평가 3단계로 나눠 시행 중 = HD현대중공업은 위험성 평가를 3단계로 나눠서 시행한다. 일상작업에 대해 6개월마다 1번씩 진행되는 '정기 위험성 평가', 비일상작업이나 업무절차가 변경됐을 때 하는 '수시 위험성 평가', 매일 작업 전이나 중간에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에서 이뤄지는 '현장 위험성 평가' 등이다. 정기·수시 위험성 평가는 관리감독자와 노동자가 함께 정성평가를 한다. 현장 위험성 평가는 노동자들이 정성적인 평가를 진행한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 20년간 발생한 산업재해 데이터를 모아 '인공지능(AI) 기반 안전사고 예측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사고유형별 발생 확률을 매일 예측해 그 결과를 각 부서로 전달한다.

HD현대중공업 작업자들은 작업발판 및 안전난간, 조명 등이 설치되지 않는 등 위험요인을 발견할 경우 바로 신고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안전작업요구권'을 갖는다. 올해 사업장에서 작업자들이 행사한 안전작업요구권은 875건에 이른다.

이러한 다각적인 안전보건 노력으로 올해 1분기 재해율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줄었다. 현장을 잘 아는 노동자들의 위험성 평가 참여는 재해 예방과 감축에 효과적이고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위험성 평가를 통해 중대재해가 사전에 예측되고 관리되는 조선소를 만들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위험의 우선순위만 매겼다면 이제 '정량적'인 평가에 '정성적'인 측면의 위험성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안전보건활동에 하청노동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윤용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은 "원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업장 안전보건 정책 수립과 점검에 하청노동자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하청노조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장을 둘러본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중공업 사업장에는 모든 위험의 가능성이 총망라돼 있는데 HD현대중공업은 글로벌 대기업답게 위험성 평가를 제대로 하고 있다"며 "현장을 제일 잘 아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안전한 일터를 만들겠다는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노사가 함께하는 위험성 평가, 자기규율 책임의 시작" 연재기사]

울산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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