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킬러문항’ 26개 공개
최근 3년 수능·올해 6월 모평 기준
국어 7개·수학 9개·영어 6개·과탐 4개 제시
교육부가 최근 3년 간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지난 1일 모의평가에서 출제됐던 ‘킬러문항’ 26개를 선별해 공개했다.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을 활용해 사교육에서 문제 풀이를 반복 훈련한 학생에게 유리한 문항을 '킬러문항'이라 정의했다. 다만 교육과정 위반 여부, 정답률 등 기준을 명확히 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고차원적인 접근 방식, 추상적 개념 사용, 과도한 추론 필요 등을 이유로 이들 킬러 문항을 골라냈다고 밝혔다. 올해 수능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킬러 문항을 출제 단계에서부터 배제하겠다고 강조했다.
킬러 문항 예시를 공개한 것은 올해 수능을 약 5개월 앞두고 수험생들이 혼란을 겪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킬러 문항 = 교육부가 공개한 국·영·수 킬러 문항 사례를 보면 2021학년도 수능에서 1개, 2022학년도 수능 7개, 2023학년도 수능 7개, 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 7개 등 총 22개다.
영역별로는 국어 7개, 수학 9개, 영어 6개다.
교육부는 킬러 문항을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으로 사교육에서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히고 반복적으로 훈련한 학생들에게 유리한 문항으로 정의하고, 교육부·현장 교원 중심으로 킬러 문항 점검팀을 구성해 킬러 문항을 골라냈다고 설명했다.
우선 수학에서는 최근 6월 모의평가에 수학 공통과목의 21번과 22번과 선택과목 ‘미적분’에서 마지막 문항인 30번이 킬러 문항으로 지목됐다. 22번의 경우 다항함수의 도함수, 함수의 극대·극소, 함수의 그래프 등 세 가지이상의 수학적 개념이 결합해 공교육 학습만 받은 학생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2023학년도 수능에서는 역시 공통과목 마지막 주관식인 22번과 선택과목 ‘확률과 통계’의 30번, ‘미적분’ 30번이 킬러 문항으로 지목됐다. 22번의 경우 공통과목인데도 선택과목으로 ‘미적분’을 응시한 수험생은 ‘변곡점’의 개념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다른 학생보다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2022학년도 수능에서는 ‘미적분’ 29번이 대학에서 배우는 ‘테일러 정리’ 개념을활용해 풀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해 수능 ‘기하’ 30번 역시 대학에서 배우는 '벡터의 외적' 개념을 활용해 풀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킬러 문항이 됐다.
국어에서는 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서 ‘몸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다룬 지문을 읽고 추론하는 14번, 조지훈의 ‘맹세’와 오규원의 ‘봄’이라는 시에 달린 3점짜리 질문인 33번이 전문 용어 사용, 높은 수준의 추론 등을 이유로 킬러 문항으로 선정됐다.
2023학년도 수능에서는 ‘클라이버의 기초 대사량 연구’를 다룬 과학 지문에 달린 15번과, 클라이버의 법칙을 이용해 농게 집게발 길이를 추정하는 17번 문제가 과도한 추론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킬러 문항에 선정됐다.
2022학년도 수능 국어에서는 ‘달러화’의 기축 통화 역할과 ‘브레턴우즈 체제’를다룬 경제 분야 지문을 읽고 푸는 13번이 높은 경제 영역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킬러 문항에 선정됐다.
영어에서는 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서 33번, 34번, 2023학년도 수능에선 34번과 37번, 2022학년도 수능에선 21번과 38번이 킬러 문항으로 선정됐다.
교육부는 선정 이유로 공교육에서 다루는 수준보다 어려운 문장 구조로 구성돼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탐구 영역을 꼬집었어야” = 일부 교육계는 초고난도 문항 배제를 통한 사교육 근절 대책은 실효성이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우선 수능을 약 150일 앞두고 ‘변수’가 나타난 셈이라 학생·학부모의 불안감이 커지고 사교육에서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모순된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실제 대표적인 학원가인 대치동에선 초고난도 문항보다 덜 어려운 ‘준킬러 문항’ 대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바꿔주고 맞춤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또 초고난도 문항이 배제되면 최상위권 내에서 변별력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게다가 실수 한 번으로 등급이 바뀌어 지원 가능한 대학 라인이 급변하는 경우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 N수생이 늘고 이는 다시 재수 학원 등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현재 선호도 높은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이 40%에 달하고 의대 쏠림도 심화되는 추세라 ‘고시 낭인’ 같은 ‘수능 낭인’을 대거 양산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초고난도 문항·사교육 카르텔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전 수능 대비에 막대한 학원비를 쏟아붓게 하는 현 입시 제도·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 고찰과 대책이 우선됐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한 과학 교사는 “과도하게 난삽한 지문과 꼬인 문제로 사교육을 유발하는 수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다면 탐구 영역을 꼬집었어야 했다. 문제 하나당 1분 내외로 정답을 찾아야 하는데, 변별을 위해 과학 문제를 수학 계산 문제처럼 낸다. 초고난도 문항에 대한 정보의 격차가 가장 크고, 경제력이 높을수록 사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수능 영역이 탐구다. 특히 정시 확대 이후 학교 수업에서 수능 대비, 즉 문제 풀이 수업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원인이 이리 뚜렷한데, 대통령과 정부는 사교육 카르텔 관련자들을 찾아 응징하려는 것 같다. 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보다 정치적 의도가 뚜렷해 보여 아쉽다”고 성토했다.
수능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양대 교육학과 박주호 교수는 “현재 사교육이나 대입 논란에서 문제는 수능의 난도가 아니다. 과도한 입시 경쟁 사회에서 수능으로 줄을 세우려니 여러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다. 변별을 위해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지문을 제시하거나 꼬아서 초고난도 문제를 낸다. 이를 접한 학생과 학부모는 수능 대비가 안 되는 학교 교육을 불신하고 사교육에 투자한다.이 문제를 해결하려 쉬운 시험을 내면, ‘변별 실패’라며 비판한다. 수능의 기능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도입 취지처럼 배운대로 쉽게 내 대학에서 공부할 역량이 있는지만 살피고, 변별은 대학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 사실 공교육이라는 게 대학을 보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다. 바람직한 인간 형성이라는 목표에 맞게 학교 교육을 정착시키는 게 정부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