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함께 위험 해소
산업안전보건 정책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바꾼다
40여년 이어온 규제·처벌 중심 정책 한계 봉착 … '위험성평가' 전과정에 근로자 참여, 규정은 단순·명확하게
1982년 '산업안전보건법' 시행 이후 유지해온 규제·처벌 중심 산업안전보건 정책이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전환됐다. 29일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사장 안종주) 등에 따르면 이는 '기술 발전'으로 작업장 내의 위험이 복잡·다양해져 일률적 규제·처벌 중심의 안전정책이 한계에 봉착한 것이 그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현장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700여개 '안전보건 규칙'이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구체적인 사업장 상황(위험)을 모르고, 사업주는 어떤 규제를 따라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다.
현실과 법규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산업안전 효과는 감소한다. 우리나라 사고사망만인율은 2014년부터 0.4∼0.5‰대에서 정체하고 있다. OECD 최하위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 지난해 '중대재해 처벌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 시행 등으로 처벌을 강화했다. 하지만 기업이 타율적 규제에 길들여지면서 자체적으로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역량이 빈약해지는 역효과로 나타났다.
실제 유족급여 승인기준 사고사망자수는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인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건설업 공사금액 50억원) 사업장에서 전년보다 9명(5.7%) 늘었다. 2022년에만 167명이 사망했다. 전체 사고사망자는 전년 828명보다 46명(5.6%) 늘었다.
문제는 안전보건 여건이 더 악화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제조·건설업 비중이 높고 원·하청 이중구조와 안전에 취약한 고령자와 외국인근로자 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현장에는 '생산 우선' 관행과 '빨리빨리'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고 사회적으로 '안전을 보는 눈'도 취약하다.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위험성평가를 가장 효과적인 정책으로 강조해왔다. 규제와 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재해를 줄일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산업재해를 줄였다. 독일과 영국의 사고사망만인율은 우리나라의 1/5 수준이다.
위험성평가는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부상이나 질병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위험 요인이 무엇인지 사전에 찾아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살펴보고, 위험하다면 그것을 감소시키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자율안전관리 제도다.
정부가 주목한 부분은 기본 안전수칙 미준수로 인한 사고가 절반 이상이라는 점이다. 2022년 산재사고 사망자를 유형별로 나눠보면 기본 안전수칙 준수로 예방 가능한 '추락'(36.8%) '끼임'(10.3%) '부딪힘'(10.5%) 사고가 전체의 57.6%에 달했다. 지난 20년간 50~60% 안팎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최근 3년간(2019~2021년) 재해조사상 사고사망을 원인별로 보면 △방호조치 불량(30.9%) △작업절차 미준수(16.5%) △위험성평가 미실시(16.1%) △보호구 미착용(15.6%) 등이다.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위험한 상태·상황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그 해결방안을 찾게 되는데 누구보다 해당 작업을 직접 수행하는 근로자가 위험과 그 감소방법을 잘 안다"면서 "사업주가 근로자를 참여시켜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하고 위험성 감소방안을 작동시키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 위험성평가 제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위험성평가는 2013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도입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현장에 안착하지 못했다. 사업주 책임성과 근로자 참여 부분을 빼고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쉬우면서도 실효성 있도록 지원" =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부는 지난달 22일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고시)'을 개정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이번 고시 개정은 현 제도가 복잡하고 어려워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중소사업장에서는 참여가 저조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2019년 고용부 작업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위험성평가를 실시한 사업장이 33.8%에 불과했다.
개정 고시는 △위험성평가 재정의 △평가방법 다양화 △평가시기 명확화 △근로자 참여 확대 △평가결의 공유 등을 원칙으로 했다. 중소사업장에서도 노사가 함께 큰 어려움 없이 위험요인을 찾아 재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새 고시에서는 위험요인 파악과 개선대책 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해가 일어나는 빈도(가능성)와 강도(중대성)를 수치화해서 계산하는 '추정'단계를 삭제했다.
그 대신 위험성평가를 계량적으로 산출하지 않고도 가능하도록 체크리스트, 핵심요인기술법(OPS), 위험수준 3단계(저·중·고) 판단법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 기존 지침에 정해져 있지 않던 최초평가 시기를 사업장 성립일로부터 1개월 이내 착수하도록 명확히 규정했다.
정기평가는 최초평가 결과의 적정성을 재검토하는 것도 인정하고, 수시평가는 공정이나 기구 변동으로 인한 추가적인 위험 요인이 있을 때 시행하도록 개선했다.
여기에 더해 수시평가를 매번 실시하기 어려운 업종 등을 고려해 상시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상시평가는 매월 1회 이상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해 감소 대책을 마련하고, 매주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중심으로 위험성평가 결과를 공유하고, 매일 근로자와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을 실시해 이를 안내하는 과정이다.
◆근로자 참여 대폭 확대 = 또 평가방법을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사례를 예방하기 위해 유해·위험요인 파악으로 제한됐던 근로자 참여 범위를 위험성평가 과정 전체로 확대했다.
기존에는 위험요인 감소 대책을 이행할 때만 근로자가 참여했고 남은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해당 작업 근로자에게 알리게 했다.
새 고시는 근로자가 현장의 위험성을 가장 잘 안다는 것을 전제로, 경험에 비춰 판단하도록 개정해 예방 효과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특히 평가 결과를 근로자에게 알리고 TBM을 통해 항상 유해·위험성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고용부는 이와 함께 위험성평가에 대한 의무를 단계적으로 법제화해나갈 계획이다. 그동안 위험성평가는 별도의 벌칙규정 없이 권고만 했기 때문에 참여율이 낮은 원인으로 꼽혀왔다.
고용부 관계자는 "태스크포스(TF)를 통해 단계적 의무화를 논의 중이며 올 하반기에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