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말하는 산재예방 (18) | 안전 선진국으로 가는 길 ④
형식에 갇힌 산업안전보건
사회의 발전은 전분야가 고르게 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분야별로 늦고 또는 더디게, 각 분야에서도 정체와 큰폭의 변화가 교차되며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전은 생산성과 품질에 비해 많이 뒤쳐진 분야다. 사건들을 통해 들여다 본, 형식에 갇힌 현재의 산업안전보건으로는 정부가 설정한 중대재해 감축 목표는 달성 불가능한 희망사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기존 근로기준법 10개 관련 조항을 1981년에 별도의 특별법으로 만들어 제정한 것이다. 그 시기는 이전의 고도성장기에 간과되었던 노동착취가 봉제공장 여성근로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등으로 표면화되고, 억눌렸던 민주화 욕구가 10.26 사태 후 혼란기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터져나올 때였다. 이 무렵 정부는 노동운동 대응 차원에서 산안법을 서둘러 제정하게 됐다.
현장의 실상과 법규의 괴리
물론 산안법규 제정 전에도 정부와 민간에서 산업안전을 다루고 있었지만 법규 제정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매우 부족한 상태여서 일본의 안전위생규칙에서 많은 부분이 인용됐다. 그런 연유로 초기 안전규칙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용어와 조항들도 상당수 있었다. 일본의 건축구조를 이해한 후에야 국내에는 해당사항이 없어서 폐기된 조항들도 있었다. 이후 안전규칙 조항들은 조금 다른 형태의 사고 때마다 추가돼 현재는 내용 면에서 제정 초기보다 수십배의 분량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안전규칙은 여전히 분명한 기준과 원칙이 없는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성과와 현장 적용성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아이디어 수준의 방안이 형식적인 정제과정을 통해 반영된다. 정제과정에 있는 사회적 비용편익 분석은 사고의 속성상 산정이 불가능한 계산인데도 지금까지 그 많은 분석에서 부당하다는 분석 결과를 보지 못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용도폐기된 조항은 그대로 둔 채 현장 작동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규칙들이 늘어가고 있다.
강의실에서 길러진 반쪽짜리 전문가
안전관리자 육성을 위한 안전공학과가 1984년에 2개 국립대학을 시작으로 확산됐고 1987년에 1회 졸업생이 배출됐다.
당시 안전공학과는 산업현장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없는 학생과 일반 공학자 일색의 교수진으로 구성됐다. 전공교육은 산업안전법규와 그의 공학적 배경 지식 위주로 이뤄졌다. 이후 산업안전공학과 졸업자들은 공공 부문과 기업의 수요 증가에 따라 사회에 편입돼 산업안전 전문가 역할을 해왔고 현재 국내 산업안전 분야의 가장 큰 비중과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대다수 교수들에게 사고와 예방은 새로운 영역이어서 추가적인 학습과 연구가 필요했으나 여건 상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공학계 교수들의 학습은 많은 부분이 연구과제 수행 과정에 이뤄지고, 그 지식이 연차적으로 졸업생들을 통해 해당 분야에 전달되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다.
생산성과 품질 기술은 기업의 이윤과 직결된다는 인식 아래 많은 연구 재원이 기업에서 투자됐지만 산업안전은 최근까지도 비용으로 인식돼 기업의 연구수요는 거의 없고, 법규와 정책 관리를 위한 공공 부문의 얼마 되지않는 연구과제가 고작이었다.
안전보건연구원 재직 때 여러 연구보고서들을 보았다. 다수가 아직도 1930년대 하인리히로 대표되는 낡은 방법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새로운 내용 없이 오래된 공개자료 만으로 짜깁기한 연구보고서가 심의에서 탈락되기도 했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기업현장에 공급되는 안전 지식술은 1980년대 안전공학과 개설 초기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야 돌이켜보게 되는 결과적 관점이지만, 안전공학과의 초기 설정에 큰 아쉬움이 있다. 생산 관련 지식과 경험이 없는 학생들과 공학자들 일색의 교수진 편제는 산업재해의 해결책을 현장과 괴리된 기술기준 중심의 미시적 영역에 갇히게 만든 원인으로 생각된다. 산업재해를 사회현상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안전공학과 개설 수준 머물러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정상적인 분포를 이룬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안전활동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차가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물론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180여년 앞선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형성된 무의식화된 안전의식이라는 엄청난 내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본질적이고 전략적 고민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