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한국 핵무장론에 조종 울린 '워싱턴선언'
윤석열 대통령의 새해 벽두 발언이 한미 관계를 흔들어 놓았다. 윤 대통령은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져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 최고지도자가 동맹인 미국의 핵억제 공약을 믿을 수 없다는 대미 불신 발언이다.
이에 미국은 분주히 움직였고, 그 결과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과 별도로 '워싱턴선언'이 발표됐다. 5월 2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윤 대통령은 '워싱턴선언'이 방미의 최대성과라며 "워싱턴선언으로 한미 안보동맹은 핵 기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업그레이드됐다"고 자평했다.
과연 그럴까?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핵무장론을 서둘러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한국이 핵무장하면 필연적으로 일본과 대만 등이 연쇄적으로 핵무장에 나서는 핵도미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 미국이 주도해 온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붕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핵협의그룹은 실효성 없는 립서비스
6월 2일 미 군축협회 연설에서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은 많은 파트너 국가들을 안심시켜 굳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없게끔 했다"고 강조하면서 '워싱턴선언'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윤 대통령이 '워싱턴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의 핵무장론은 더 이상 거론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워싱턴선언'에서 기존 외교·국방차관급 확장억제력전략협의체(EDSCG)와 별도로 차관보급 핵협의그룹(NCG)을 설치하기로 했다. 나토 핵공유의 핵심기구인 핵기획그룹(NPG)과 달리 NCG는 기획(Planning)은 물론 조정(Coordinating)하는 기구도 아니며, 단지 미국이 자국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 입장을 청취하는 협의(Consultative) 창구일 뿐이다.
'워싱턴선언'은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지역 정례적 가시성 증가와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visit)을 약속했다. 하지만 6월 16일 부산에 기항한 것은 전략핵잠수함(SSBN)이 아닌 오하이오급 유도탄핵잠수함(SSGN) 미시건함이다. 결국 전략핵잠수함의 방문을 약속한 '워싱턴선언'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핵은 핵으로만 억제할 수 있다"는 통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핵 없는 한국은 북한 핵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이 전술핵무기 재배치와 자체 핵무장을 거론한 근거이기도 하다. 전술핵무기 재배치 방안에는 '주한미군 전술핵무기 보유'와 '나토식 한미 핵공유'가 있고, 자체 핵무장 방안에는 재처리 권한 확보를 통한 '잠재 핵무장론'과 NPT 탈퇴를 통한 '최소억제 핵무장론'이 있다. 모두 다 미국의 동의나 묵인이 필요한 것이다.
현무탄으로 북핵 억제 가능
현재 미국은 나토회원국에 배치한 공중투하용과 해상함정용 핵탄두만 갖고 있으며 과거 한국에 배치했던 지상무기용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주한미군기지에 핵무기를 보관할 경우 중국·북한의 핵타격목표로 노출될 수 있어 억제력으론 한계가 있다. 2015년 중국의 '괌 킬러' 둥펑-26 탄도미사일 실전 배치와 2017년 북한의 괌 주위 4곳에 대한 화성-12형 위협사격 경고 뒤 2020년 미국이 괌의 전략자산들을 모두 미 본토로 철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술핵무기의 해상배치는 가능하나 중국·러시아를 자극해 역내 핵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논의가 중단됐다.
나토식 핵공유 방식은 미국 전술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했다가 유사시 한국공군기가 투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위반일 뿐 아니라 NPT 위반이다. 그나마 나토식 핵공유가 가능했던 것은 NPT 체결(1970년) 이전인 1966년에 완성됐기 때문이다. 미국 전술핵무기를 얻기 위해 미국 주도의 NPT를 탈퇴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최소억제 핵무장론은 NPT 탈퇴를 전제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 이에 비해 사용후연료의 재처리권한 확보를 통한 잠재 핵무장론은 미국만 동의한다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가능하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권한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의 군사적 대안은 증강된 재래식 전력이다. 현재 우리 군은 3축체계에 맞춰 다양한 첨단무기를 개발해왔다. 특히 현무-IV는 극초음속 탄도미사일로 여기에 확산탄을 부착하면 축구장 200배 면적의 생명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최근 이보다 강력한 현무-Ⅴ도 개발됐다.
북한이 공개한 전술핵탄두 화산-31형은 10kt(추정)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탄두 15kt, 21kt보다 경량이다. 일본의 경우 핵폭발로 반경 1.5km까지 50% 이상의 사망률을 보였다. 사망자가 1명 이상 나온 핵폭발 반경 5km이면 축구장 3500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산탄을 부착한 현무-IV 탄도미사일 17개의 살상력에 해당한다. 화산-31형은 현무-IV를 17개 합친 것보다 폭발력이 약하기 때문에 미 확장억제력 공약과 함께 현무-IV 다량 보유로 북한 전술핵무기를 억제할 수 있다.
'워싱턴선언'은 '확장억제 강화'를 강조하면서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달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진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과의 전제조건 없는 대화와 외교를 확고히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는 확장억제 강화조치에 초점을 맞추나 이는 북핵 위협에 대한 조치일 뿐 북핵 문제의 해법은 아니다.
다시 외교의 시간으로
지금 국제정세의 기류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친강 외교부장, 시진핑 주석 등과 연쇄 회동했다. 미중은 작년 8월 펠로시 미 하원의장(당시)의 대만방문으로 끊어진 군사핫라인 복원과 시진핑 주석의 11월 방미, 북핵문제에 대한 미중 협력 등을 협의했다. 중국 중재로 북미대화가 재개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대화 기류는 북일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기시다 총리는 5월 27일 북일 정상회담을 제안한 데 이어 6월 21일 북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총리 직할의 고위급 협의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북한은 기시다의 첫 제안 뒤 박상길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통해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이례적으로 신속히 반응했다. 같은 날 군사정찰위성 발사 계획을 국제해사기구(IMO) 외에 일본에만 사전 통보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은 대북 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핵 관리와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대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미회담을 담당했던 김영철 통전부 고문 복귀 등 최근 북한 내부동향으로 볼 때 항저우 아시안게임 등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방중해 북중 정상회담을 연 뒤 북일 및 북미대화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올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중관계는 내년 11월 미 대선과 후년 1월 신정부 출범까지는 외교의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제정세의 흐름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도 윤석열정부의 국제정세 및 대북인식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제라도 정세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책 전환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