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역사 산촌 하루아침에 폐허
경북 예천 상백마을 전파
4명 사망·1명 실종 피해
16일 오후 4시. 전날 새벽 산사태로 폐허로 돌변한 집터에서 실종됐던 부부 가운데 아내(60대) ㄱ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있기를 기대했던 아들과 오빠 등 가족들은 눈물을 훔쳤다. ㄱ씨는 진입로가 끊겨 마을 아래에 대기 중인 응급차까지 구조대 들것에 실려 운구,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북 예천군 효자면 상백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날 함께 실종된 남편 장 모씨를 찾기 위한 구조작업은 오후 6시를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장씨는 종편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유명인으로 알려졌다.
◆예천군 전체 인명피해 17명 = 17일 경북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예천군 전체 인명피해 17명 가운데 5명이 상백마을 주민이다. 이 마을에는 13가구 20여명이 살고 있었는데 15일 산사태로 1/4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상백마을은 하백 텃골 제촌 등 효자면 백석리 자연부락 중 하나다. 마을 초입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성황당, 은행나무 두그루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마을 역사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보호수 바로 뒤로 보이는 마을은 물폭탄을 맞아 초토화된 폐허 그 자체였다. 마을 안길은 도랑으로 변해 흙탕물이 흐르는데 그나마 동네 흔적을 짐작케 했다. 안길 양쪽에 집들은 대부분 폐허로 변했고 진흙더미 속에서 잔해만 튀어나와 있었다. 남아 있는 집은 고작 서너채.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뿐 기둥이 뽑히거나 대부분 부서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라 대형장비가 진입할 수 없어 실종자 수색에는 소형굴삭기 10여대가 동원됐다. 바위덩어리와 아름드리 나무, 냉장고 등 가재도구, 트랙터 등 농기구, 차량 등이 뒤엉킨 진흙더미에서 큰 장애물들을 걷어내며 수색이 진행됐다. 굴삭기가 건축자재와 수목 등을 걷어내면 경찰과 소방관들이 삽과 철제 탐지봉을 활용해 진흙더미 속을 더듬듯 수색했다. 탐지견 두마리도 동원됐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피해자는 대부분 귀향했거나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귀촌한 이들이다. 사과농장을 하는 이 모(61)씨는 "15일 아침 농장을 보기 위해 찾았는데 안길로 흙탕물이 무릎 높이까지 쏟아져 내려 마을쪽으로 올라 갈 수 없었다"며 "수백년 역사를 간직한 마을에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10여 가구에 정확히 몇명이 사는지 알 수 없다"며 "토박이는 손꼽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마을 위에 작은 계곡을 둔 형상 = 예천군에는 지난달 26일부터 20여일동안 나흘만 제외하고 매일 비가 내렸다. 지난 13일부터 16일까지 강우량은 242.9㎜였고 효자면 일대에는 14일 231㎜를 포함 329.1㎜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재난전문가들은 마을 안길이 물길 역할을 해 피해가 커진 것으로 보고 있다. 상백마을 복판에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포장된 3m 너비 안길이 있고 양쪽으로 마을과 사과밭 등이 계단식으로 형성돼 있다. 안길은 기존 작은 도랑을 덮어 포장한 복개도로다. 도로는 마을 아래쪽에서 1시 방향에 위치한 뒷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작은 계곡을 마을 머리 위에 둔 형상이다. 수로는 포장도로 옆에 50㎝ 폭으로 나 있다.
한 재난전문가는 "자연하천이나 계곡 도랑 등을 복개하고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해 길을 만들면 이번 장마처럼 집중호우가 쏟아질 때 수로가 감당을 못한다"며 "물이 도로로 넘치고 유속도 빨라져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15명은 마을에서 2㎞ 떨어진 경로당에서 망연자실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