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슬기로운 지구 생활자'를 위한 자연사박물관
바다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미국 동부 오대호 연안, 마천루들로 가득한 도시 시카고에는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과 더불어 미국 3대 자연사박물관으로 손꼽히는 필드박물관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티라노사우루스 화석 ‘수(SUE)’가 전시된 필드박물관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893년 세계 박람회 개최 과정에서, 아예 박물관 건립을 염두에 두고 진귀한 전시품들을 수집하고 기금을 모아 박람회 개최 이듬해인 1894년에 개관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에 나포된 독일 잠수함 유보트(U-505)를 볼 수 있는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과 더불어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시카고 명소다.
우리가 흔히 보는 현재와 같은 박물관은 17세기 말 영국 변호사 엘리아스 애쉬몰이 자신의 수집품을 ‘대중 공개’를 목적으로 옥스퍼드대에 기증하면서 탄생했다. 최초의 박물관으로 알려진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뮤제이온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과 함께 거주하며 공부하는 고급 교육기관 형태였고, 중세의 박물관들은 교회나 귀족들의 수집품을 소수에게만 공개하는 제한적인 공간이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너도나도 박물관을 세워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사물과 유적, 자국의 과학기술 성과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수집품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면서 수집품의 체계적인 분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는 자연 분류 체계를 정립했고,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식물학자 라마르크를 큐레이터로 고용하며 연구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주도했다.
20세기 들어 박물관은 일방적인 전시를 넘어 소통을 고민했다. 그 시작 역시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전시품 배열을 진화의 과정에 따라 할 것인지, 생물의 분류 체계에 따를 것인지와 같은 새로운 질문이 등장했고, 수집품을 단순히 배치하는 대신 실제와 비슷한 환경을 구현해 보여주는 입체 모형, 디오라마도 이런 고민의 결과로 등장했다. 요즘은 전시물과 관람객이 서로 소통하며 상호작용하는 몰입형 전시 등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표현의 한계가 줄어들며 다양한 전시들을 꽃피우고 있다.
전시공간에서 담론형성의 장으로 변화
한편 필드박물관은 조금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자연사박물관 대부분이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했었다면 대상을 통한 사색의 장으로서 담론 형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필드박물관의 ‘진화하는 행성’ 전시는 지질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시물들을 배열하되, 대멸종을 기준으로 공간을 구분하고 오브제를 활용하여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SUE)’를 보러 오는데, 대멸종의 단계들을 지나지 않고서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SUE)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전시 공간에서 나오려면 필연적으로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6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고(매일 82종이 멸종되고 있다!), 아침 8시부터 현재까지 몇 종이 멸종되었는지를 실시간 숫자로 보여준다.
특히 ‘원주민의 진실: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이야기’ 전시에서는 그 의도를 더 확실히 드러낸다. 2015년에 유물 중심에서 원주민 역사와 문화를 해석하고 현재 직면한 과제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개편한 이 전시는, 밝지만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첫 번째 아메리칸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 조상은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해준다’와 같은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마주하며 전시물 관람보다는 자연스럽게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땅과 그곳에 먼저 터를 잡은 사람들, 고립되고 분리되어 지내는 그들의 현재 모습,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사색에 잠기게 한다.
아프리카 전시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문화 소개 말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노예로 미대륙에 끌려왔다는 것과 노예무역의 영향을 명시하고, 함께 살고 있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주목하며 함께 살기,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의 일부로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산하고 있다. 대상으로서의 과학을 전시하고 해설하는 공간에서, 메시지를 담고 담론을 형성하는, 과학을 통한 사회적 참여의 공간으로 변하고자 하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박물관이 인류 미래를 위한 사회적 역할 하길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박물관의 정의에서도 드러난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는 지난해 ‘다양성과 지속가능성 촉진’, ‘공동체의 참여’ 등을 담아 박물관 정의를 다음과 같이 개정했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상설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며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 교육·향유·성찰·지식·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앞으로 보다 많은 박물관이 인류의 나은 미래를 위한 담론 형성의 장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