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내일신문 공동 기획│남도 섬순례, 몰랑길 199㎞를 가다
바다 위의 모래사막 … 정약전이 '표해시말' 쓴 섬
홍어장수 문순득, 오키나와-필리핀-중국 거쳐 우이도 귀환 … 300여년 전 조선 수군들이 만든 항구 고스란히
섬의 쓸모는 의외로 광범위하다. 주민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관광객에는 소중한 휴식과 힐링의 공간이 된다. 소중한 해저 자원의 보고이면서, 우리 영토의 시작이 되는 영해기점의 역할처럼 안보 수호의 첨병 역할도 한다.
정부와 지자체도 그런 섬의 쓸모에 주목하면서 관련 정책과 투자,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 섬의 64%인 2165개의 섬을 가진 전남도가 섬 둘레길의 명칭으로 브랜딩하고 있는 몰랑길은 그 흐름의 산물이다. 5회의 기획 연재로 '섬'을 다시 생각하고 만나본다.
"오늘 날을 잘 받으셨네요! 풍성사구의 모래가 어디서 오는지 잘 볼 수 있는 날입니다."
11월 14일 전남 신안군 우이도 2구 박흥영 이장의 안내로 풍성사구 꼭대기에 올랐다. 풍성사구는 '바람이 만든 사구'라는 뜻인데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산태'라고 불렀다.
여기엔 옛날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배를 타고 나간 총각이 풍랑에 목숨을 잃자 처녀도 바다에 몸을 던졌고 총각은 바람, 처녀는 모래가 되어 이 산태를 만들었다는 전설이다. 높이 80m의 풍성사구 정상에 오르니 거센 서북풍이 몰아쳤다.
모래언덕에 앉아서 보니 정상부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남쪽 경사면으로 흘러가는 게 뚜렷하다. 북쪽 바닷가 모래톱에서 80m 높이를 바람에 날려서 올라왔으니 밀가루처럼 고운 입자의 모래들이다.
◆사구 경사면은 통제, 정상부 개방 = 이런 고운 모래는 수억년에 걸친 화강암 풍화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모래가 바람에 잘 날리게 해주는 역할은 바닷가 모래톱에 구멍을 파고 사는 게들이 한다. 썰물 때 게들은 끊임없이 작은 모래경단을 뱉어내 모래가 빨리 마르고 바람에 날려가기 쉽게 만든다.
박 이장은 "풍성사구는 남쪽 해안이 아니라 북쪽 해안의 모래가 서북풍에 날려서 만들어진다"며 "공급되는 모래의 양이 많지 않아 사구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걸어다닐 경우 사구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섬 속의 사막'이라는 특이한 풍광 때문에 우이도는 한때 연 3만여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구에서 미끄럼을 타고 걸어다니면서 사구의 모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국립공원이 사구 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지시키자 이번엔 풀과 나무가 사구를 뒤덮었다. 우이도 특유의 사막 경관이 사라지면서 사람들 발길도 끊어졌다. 최근 국립공원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사구 경사면에 자라는 풀과 나무를 제거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한다. 또 풍성사구 동쪽으로 우회 탐방로를 만들어 사구 정상부 탐방을 허용했다.
이제 풍성사구는 예전처럼 풍성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우회 탐방로 주변의 '순비기나무' 대규모 군락도 눈여겨 볼 식생이다.
◆홍어장수 문순득의 집 그대로 = 우이도는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했던 중요한 섬이다. 일제강점기 뒤로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다.
우이도 1리(진리) 선착장에는 조선시대 수군들이 함선을 정박했던 부두가 그대로 남아있다. 1745년(영조 21년)에 호박 크기의 넙적한 돌을 쌓아서 만든 '우이선창'은 포구와 선창, 조선소 역할을 했다. 수백년 동안의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문종옥 우이도 1리 이장은 "아무리 큰 파도가 와도 충격이 다 흡수되도록 설계한 것"이라며 "지금도 태풍이 오면 배들이 이 안으로 피항을 한다"고 말했다.
우이선창은 현재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돼있는데 (사)섬연구소 강재윤 소장은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보전하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우이도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1758~1816) 선생이다. 그는 우이도에서 1801년부터 1806년까지 1차 유배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홍어장수 문순득의 오키나와-필리핀 표류기를 '표해시말'이란 책으로 기록했다.
우이도 주민 문순득은 1801년 12월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로 표류했다. 여기서 3개월을 머물다 중국행 배를 탔는데 또 풍랑을 만나 여송국(필리핀) 마닐라까지 흘러갔다. 여송국에서 9개월을 머물던 그는 마카오-난징-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 우이도로 돌아왔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극진하게 장례를 모셨다. 정약용도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도 지어주고, 형의 장례를 잘 치른 데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표해시말은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일로카노어(54개)로 번역해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 가치가 높다. 일본에서는 100여년 전에 완역됐고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에 완역본이 나왔다.
우이도 진리마을에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살았던 집이 남아있다. 최근까지 후손들이 살다가 국가 보호를 요청하며 신안군에 헌납했고 신안군에서 개보수를 하고 있다.
◆원시 풍광 그대로, 띠밭너머해변 = 우이도에는 '달뜬몰랑길'이 있다.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이다. 진리선착장(우이도항)에서 시작해 진리마을과 예리마을을 거쳐 돈목마을까지 이어지는 둘레길이다. 예전 예리마을 사람들이 진리와 돈목마을을 다니던 길이다. 5.4km 거리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진리마을에서 언덕을 넘어 띠밭너머해변을 가보는 것도 좋다.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긴 모래톱 해변이 펼쳐지는데 인공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이 모래톱은 사리 때 물이 많이 빠지면 마두산 밖으로 연결돼 풍성사구 인근 성촌마을까지 이어진다.
우이도에는 식당이 없다. 민박집에 묵으며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 집집마다 다른 제철 먹거리로 밥상을 차려내는데 입맛 까다로운 이 지역 공무원들이 음식에 취해 대화도 안하고 밥을 먹을 정도다.
14일 오후 돈목리 다모아민박에서 점심을 먹었다. 계속 바다 날씨가 안 좋아 출항이 몇차례 연기된 끝에 이날 오전 9시 30분 암태도 남강항에서 신안군 행정선 1004호를 탔다.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바다장어 조림, 꽃게찜, 반건조 민어찜에 돈목해변 비단조개로 끓인 조개탕까지 … 우이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짜 섬마을 정식이었다. 이런 풍성한 상차림이 1인분에 1만5000원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섬 코디네이터 100% 활용하기
전라남도는 관광객들이 섬을 안전하게 탐방할 수 있도록 섬코디네이터를 양성한다.
코디네이터는 그 섬의 역사 이야기와 함께 어릴 적 동화 같은 옛 추억까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민박집 안내도 받을 수 있다.
전남가고싶은 섬 홈페이지에서 섬별 여행정보로 들어가서 미리 연락을 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섬 주민이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따로 안내비나 수고비 등은 받지 않는다. 날씨나 배 시간 등도 섬코디네이터와 상의하면 된다.
△우이도 섬 코디네이터
김성률(010-9977-8751)
문정옥(010-3633-7055)
문종옥(010-3632-3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