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후 더 빛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별세
북한·쿠바 등 방문 평화 애써
평화전도사 노벨평화상 수상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약 1년전에 입소한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호스피스 요양원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 센터는 밝혔다.
리처드 닉슨이 몰락한 후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 소속 조지아 주지사였던 지미 카터는 백악관 4년 임기를 마칠 무렵 미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1980년, 지미 카터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했다.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순진하고 나약하며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는 백악관을 떠난 후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며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그는 강연으로 돈을 버는 대신 전 세계 반군 세력의 휴전 협상을 위해 노력하고, 취약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선거를 감시하는 등에 전념했다. 카터는 북한을 비롯해 중동, 쿠바, 니카라과, 라이베리아, 소말리아, 수단, 에티오피아, 아이티, 보스니아 등 대통령 집무실을 떠난 후 수많은 중재에 관여했다.
재임기간인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정상화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성공 외에도 그는 이집트와 중국의 관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소련과의 솔트II(SALT II) 핵무기 통제 협상을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이 조약의 비준에 도전이 생겼고, 1979년 이란 혁명의 발생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인질 사태는 그의 마지막 임기를 힘들게 했고,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미국 대사관 직원 구출을 위한 비밀 작전의 실패후 그는 무능과 나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3년 이른바 1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임박했을 때,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는 미국과 북한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해 김영삼과 김일성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2011년 미국인 인질을 데려오기 위해 북한을 또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2000년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후, 그는 무자비한 비판자가 되었다. 이라크와의 충돌 가능성에 대한 인터뷰에서 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가 제안한 ‘예방 전쟁’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틈을 타 오랫동안 억눌려 온 야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핵심 그룹”을 비난했다.
2002년 피델 카스트로의 초청으로 쿠바를 방문한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모든 반대 의견을 일축하면서 “쿠바를 방문하기 전에 자문을 구한 미국 전문가들이 공산주의 섬이 생물학 무기의 확산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언했다”고 선언했다. 카터 대통령은 방문 결과를 설명하며 자국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 흑인, 정신 질환자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미국의 사형제도와 건강과 교육의 불평등을 언급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수십 개국을 돌며 인권·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사회 운동에도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