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무슨 근거로 '시중은행 대출담합' 판단했나
'은행마다 대출금리 왜 비슷하게 따라갈까' 의문 풀렸다
기록 안남기려, 담당자 직접 만나 '대출조건' 상세 공유
은행권 "담보회수율 신뢰도 검증 위한 단순 참고 목적"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 시중은행이 담보대출 금리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담합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8일 공정위는 이들 은행에 심사보고서(검찰의 공소장 격)를 보내고 제재절차를 시작했다.
공정위가 이날 보낸 심사보고서에는 4대 은행에 대한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 의견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심사보고서에는 4대 시중은행들이 개인과 기업을 상대로 담보대출 업무를 하면서 거래조건을 짬짜미해 부당 이득을 취득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은행들이 물건별 담보인정비율(LTV) 등 대출에 필요한 세부 정보를 공유하면서 고객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대출 조건이 설정되지 않도록 담합을 벌였다는 것이다.
◆대출조건 공유하면서 금리결정 = 이번 사건 조사는 지난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권 경쟁 촉진 대책 마련'을 지시한 뒤 급진전했다. 윤 대통령은 당시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금융 분야는 민간 부문에서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으나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고, 과점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며 "경쟁 촉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공정위는 윤 대통령의 지시 직후 KB국민·신한·하나·우리·IBK기업·NH농협 등 6대 은행에 대한 현장 조사를 통해 대출 업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지난해 6월에는 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에 대한 추가 현장 조사도 진행했다.
공정위는 조사과정에서 '대출 금리 담합' 의혹에 대한 직접증거는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심사보고서에도 그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출금리 핵심정보를 공유한 증거를 확보하면서 조사가 급물살을 탄 것으로 전해졌다.
공정위 사정에 밝은 전직 공정위 관계자 A씨는 "4대 은행 담보대출 담당자들이 수시로 만나 담보대출 거래조건과 관련한 정보를 세세하게 공유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대출금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할 은행들이 '자신의 패'를 까고 금리를 결정한 셈이다. 이들은 특히 담합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문자나 카톡 등의 SNS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수시로 만나서 이런 정보를 공유한 뒤 담보대출 금리결정에 참고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 확인해주기 어렵다"면서도 '은행 담당자들의 수시회동과 정보공유 확인' 여부에 대해 부인하지도 않았다.
◆은행권 반발 기류, 소송전도 불사할 듯 = 은행권에서는 이번 공정위 결정과 관련 지난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의 '금융권 경쟁촉진 대책 마련' 지시 이후, 성과를 보이기 위해 '담합'에 대해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반발 기류가 읽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공정위에서 지목한 타행과의 부동산 담보회수율 교환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하지만 이는 산출값 자체의 신뢰도 검증을 위한 단순 참고목적 활용에 그쳤고, 금리 수수료 담합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은행권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무리한 해석이 결국 소송 등에서 가려질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2008년 지로수수료 인상 담합과 2012년 CD금리 담합 관련 공정위 결정이 모두 법원에서 패소했다"며 "은행 내부적으로 법적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대법, 거래조건 공유도 담합 = 하지만 대출금리 자체를 짬짜미하지 않더라도 거래조건 등 중요정보를 공유한 것만으로도 제재대상이 된다는 것이 공정위 입장이다.
앞서 공정위는 2021년 경쟁사 간 명시적 의사 연락이 없더라도 묵시·암묵적인 의사의 합치가 있는 경우도 합의가 있었다고 본다는 내용으로 카르텔 분야 행정규칙을 개정했다. 경쟁사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값을 얼마로 올리자'고 합의하는 식의 전통적인 담합이 아니라도, 시장 지배적인 사업자가 가격을 올리면 나머지 업체가 따라가는 식도 담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법원 판례도 공정위 입장과 비슷한 흐름이다. 최근 대법원이 손해보험사들의 보험요율 공동결정 행위를 담합으로 판단한 판례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공정위는 지난 2007년 일반손해보험 중 8개 주요 상품의 보험요율을 공동으로 결정하는 담합행위를 해온 10개 손해보험사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407억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보험사들은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보험료를 산출하는 기준인 순율, 부가율 및 할인률에 관해 합의한 행위도 공정거래법 제19조 제1항 제1호에 규정된 '가격 공동행위'에 해당된다며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은 손해보험사들이 보험료 수준을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하기 위해 보험료 산출기준을 합의한 행위는 금융감독당국의 행정지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보험시장에서의 경쟁제한효과가 매우 크다고 판단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가격 자체를 특정 수준으로 고정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가격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 대한 합의도 부당한 공동행위에 해당한다는 판례로 공정거래법상 금지 범위를 넓게 인정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통신비·주류 등 담합사건 줄대기 = 한편 이번 조사는 정부가 발표한 '서민 생활 밀접 품목 불공정행위 집중 점검' 방침의 일환이기도 하다. 은행 대출금리에 이어 앞으로 통신사와 주류, 유통 등 서민생활 관련 담합사건들이 줄줄이 제재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앞서 정부는 올해 초 발표한 '2024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석유와 주류, 통신장비, 금융, 아파트 입찰, 돼지고기 유통, OTT 서비스 등을 민생 밀접 품목으로 꼽으며 부문별 경쟁제한 요소 개선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이와 관련해 통신 3사의 판매장려금 담합 의혹, 주류 도매업체의 납품가 담합 의혹, 돼지고기 가공업체의 가격 담합 의혹, OTT 서비스 업체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의혹 등도 조사 중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향후에도 산업 특성상 공조체계가 공고하거나 행정지도를 빌미로 담합행위가 이루어질 개연성이 높은 산업에 대해 상시 감시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적발된 사업자에 대하여는 엄중한 대처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