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가습기살균제 판결과 집단지성

2024-01-30 11:27:38 게재
최진희 서울시립대 교수 환경독성학

인체에 무해하다고 광고하며 마트에서 파는 제품을 사 표시된 방법대로 사용했을 뿐인데 숨을 못 쉴 정도로 폐가 딱딱해져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야 사람들이 생겼다. 죽는 사람들도 나왔다. 1994년부터 시판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건강피해가 발생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17년이 지난 후인 2011년에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공식적으로 인정된 피해자만 5667명, 그중 1258명은 사망자다. 17년 동안 마트에서 버젓이 판매되었으니 거의 전국민이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도 많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대규모 화학사고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있으나 가습기살균제 사고는 명백히 아직 현재 진행중인 사건이다.

1월 11일 가습기살균제 2심 판결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애경산업과 SK케미칼에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번 판결은 CMIT/MIT라는 원료물질을 이용한 제품을 제조 판매한 기업에 대한 판결로, 2019년 1심에서는 이 원료물질과 폐손상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가 선고된 바 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새로운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여 "안전검사없이 출시해 장기간에 걸쳐 전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PHMG라는 원료물질을 이용한 제품을 제조 판매한 옥시는 이미 2018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옥시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 승소판결이 2023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동안 '내 몸이 증거'라며 호소한 수많은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는 많이 늦었고 완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큰 판결들이다.


전문가와 법률가들의 과학적 노력이 빛 봐

이러한 판결 뒤에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건강피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연구자들과 피해구제 제도 마련을 위한 정부의 무수한 노력들이 있었다. 2014년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질환'으로 인정하고,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체계적인 피해구제를 시작했다. 2020년 특별법을 개정해 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환경오염의 피해구제에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법 도입을 제도화한 매우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화학물질 노출과 건강피해 간의 관련성 확인을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얻어진 과학적 근거의 종합 검토와 해석이 필요하다.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은 2021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에 사회적 책임감으로 뜻을 모은 유관 학회와 역학 독성학 의학 환경노출 분야 전문가와 법률가 등으로 '역학적 상관관계 검토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지난 3년 동안 피해자들의 건강 모니터링, 가습기살균제 노출과 건강 영향에 관한 역학연구, 동물실험을 통한 독성연구를 종합하고 질환별로 역학적 상관관계에 대한 과학적 결론을 통해 가습기살균제 노출과 특정 폐질환 간 역학적 상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위원회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결과들이 형사 및 민사소송에서 인과관계 추정의 근거로 활용되어 피해자들에게 보다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될 수 있도록 역학적 상관관계에 대한 법리적 검토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법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 간의 차이를 파악해 복잡하고 난해한 과학적 지식을 법적 논리에 적합하도록 재구성했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노력이 이번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 근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현대사회 문제 해결에 좋은 참고 사례 될 듯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의 한계로 다양한 질환 간의 역학적 상관관계 입증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과학은 진보한다. 그간 확인되지 않은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해석해 역학적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위원회에서 시도한 이러한 경험들은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넘어서, 점점 복잡다기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집단지성 활용에 대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지금, 유죄판결을 받은 기업들은 하루라도 빨리 배상·보상 방안에 합의해 피해자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일 것이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Engineers & Scientists for Change)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