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IT업계 압박에 물러선 정부 … 플랫폼법 백지화 위기

2024-02-08 13:00:03 게재

"총선 앞 여론악화 우려” 해석도 … 공정위 “사전지정제 등 의견 추가수렴”

미국 상공회의소와 관련 업계 반발에 밀려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플랫폼법) 제정이 표류하게 됐다. 정부가 이르면 설 이전 추진하던 법안내용 공개를 미루고 ‘추가 의견수렴’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는 4월 총선 이전 법 제정도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미국 상공회의소가 반대입장을 내고 정보기술(IT) 업계의 반발이 커지면서 결국 정부가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변화에는 특히 총선을 앞두고 부담이 된다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판단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미국과 국내 관련 업계의 압박에 밀려 백기를 들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1년여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논의해 온 공정위가 구체적인 법안 발표를 무기한 연기하면서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다만 공정위는 “법 제정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며, 추가로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취지”라고 해명하고 있다.

발언하는 공정위 부위원장 공정위가 플랫폼법 법안공개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열린 ‘슈링크플레이션’ 대응 관련 부처 간담회에서 조홍선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TF 띄운 지 1년 넘도록 = 8일 공정위에 따르면 이달 중 예정됐던 플랫폼법 발표가 무기한 연기됐다. 조홍선 공정위 부위원장은 전날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정 제도를 포함해 다양한 대안을 열어 놓고 학계 전문가들과 충분히 검토해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겠다”며 “의견 수렴을 통해 법안 내용이 마련되면 조속히 공개해 다시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공정위는 지난해 1월부터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온라인 플랫폼 규제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어 지난해 12월 플랫폼법 제정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법안의 주요내용은 두 달 넘게 공개되지 않아 업계에선 ‘깜깜이 입법’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구글, 애플 등 사전 규제 대상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기업들은 플랫폼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정위와의 간담회에 불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정위가 법안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관련 업계 반발에 힘이 실렸다. 공정위는 “부처간 합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거듭 해명해야 했다.

◆총선여론도 고려했나 = 총선 여론에 대한 여당의 우려도 ‘입법 추진 연기’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최근 플랫폼법 관련 비공식 당정협의과정에서 여당이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안다. 이를 계기로 플랫폼법 추진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실제 지난 5일 공정위는 국민의힘 정무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나 플랫폼 경촉법의 주요 내용을 협의했다. 관계부처 조율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 공정위가 법안 발의를 위해 국회를 찾은 것이었다. 공정위는 플랫폼법을 신속하게 국회에서 처리하기 위해 의원 입법 형식으로 법 제정에 나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여당이 부정적 입장을 내놓으면서 플랫폼법 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관련업계의 반발이 거센 만큼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부담스럽다는 취지다.

앞서 국회입법조사처도 최근 “사업자를 사전 지정하는 방식의 규제 도입 필요성 또는 시급성이 분명하지 않고 플랫폼 사업자가 스스로 성장 기회를 포기하도록 유인한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내에서 플랫폼법 반대기류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을 키웠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최근 성명을 내고 “플랫폼 경촉법은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경쟁을 짓밟고, 선량한 규제 관행을 무시하며 외국 기업을 임의로 표적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다.

◆재계 압박에 또 굴복하나 = 윤석열정부 출범 뒤 공정위의 주요정책이 재계 압박에 후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도 공정위는 기업의 사익편취 행위에 관여한 총수 일가(특수관계인)를 원칙적으로 고발하도록 지침을 강화하려다 재계 반발에 백지화된 경험이 있다.

지난해 3월 대법원은 “특수관계인이 계열회사의 임직원 등에게 부당한 이익제공행위를 장려하거나 관련된 보고를 받고 이를 명시적·묵시적으로 승인했다면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놨다.

공정위는 대법원 판례를 반영해 지난해 10월 ‘일감몰아주기 고발지침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고발을 원칙적으로 하되 고발조건을 구체적으로 정해 남발되지 않도록 한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재계 단체가 크게 반발하면서 결국 고발지침 개정안은 백지화됐다. 플랫폼법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 ‘재계와 정치권 눈치 보느라 공정위 핵심정책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소상공인 압도적으로 플랫폼법 찬성 = 반면 소상공인들은 압도적 다수가 플랫폼법 제정을 긍정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상공인연합회(회장 오세희)는 소상공인 557명을 대상으로 한 플랫폼법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전날 발표했다.

설문결과를 보면 소상공인의 84.3%가 플랫폼법 제정에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인 응답은 4.9%에 그쳤다. 다만 현재 규율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는 공정위와 온도차가 있었다.

규율대상에 ‘시장을 좌우할 정도로 소상공인 업종에 직접적인 피해는 주는 플랫폼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76.6%로 다수를 차지했다. ‘법은 최소한의 규제로 파급력이 큰 소수 거대플랫폼만 지정해야 한다’는 응답은 14.4%에 머물렀다. 4~6개 정도의 공룡플랫폼만 사전규제 대상으로 지정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미흡하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독과점 플랫폼의 반칙행위로 인해 사업장에 가장 큰 피해를 끼쳐 규제가 필요한 온라인 플랫폼으로는 ‘직방·다방 등 부동산플랫폼’이 30%, ‘배민·쿠팡이츠 등 음식 배달 플랫폼과 야놀자·여기어때 등 숙박 플랫폼’ 29.1% 등 생활밀착형 서비스 플랫폼들을 꼽았다. 구글·애플·네이버·카카오는 14.2%였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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