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마지막회
일제의 강압으로 끝난 대한제국의 대미외교
을사늑약 전부터 주미공사관 폐쇄 준비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서양 국가 중 처음으로 1888년 미국 워싱턴 DC에 개설한 주미조선(대한제국)공사관 폐쇄 과정을 소개하고 일제에 의한 강제매도 금액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고자 한다.
을사늑약으로 재외공관 폐쇄 결정이 난 후 주미공사관은 1906년 2월 마지막 14대 서리 공사였던 김윤정(金潤晶)이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즉 선폐쇄 조치 후 소환 과정을 밟은 셈이다. 공사관 건물은 1910년 9월 1일, 일제가 ‘5달러’에 강제 매입한 후 바로 미국인 풀턴(Horace K. Fulton)에게 ‘10달러’에 매각한 것으로 돼 있다.
5달러에 매입후 10달러 매각으로 기록
을사늑약은 14대 서리공사 김윤정 재임 시기에 체결됐다. 하지만 일제는 을사늑약 체결시점보다 1년 2개월 앞선 1904년 9월 6일부터 주미공사관을 포함한 대한제국의 재외공관 폐쇄 방침을 세운다. 그때부터 당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비밀리에 재외 대한제국공관의 외교관과 그 관원들에게 사가(賜暇) 귀국, 즉 현지공관을 정리하고 귀국할 수 있도록 했고, 그후 재파견이나 후임 파견을 중지하는 대신 주미공사관 업무나 권리 및 이익 등은 모두 현지 일본공사관이 인수해 시행함으로써 주미공사관을 폐쇄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1905년 3월 주미공사관은 심한 재정적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04년 12월 이후 대한제국정부가 신태무 서리공사 및 관원들의 봉급 및 관리비 등 공사관 운영에 필요한 모든 송금을 끊었기 때문이다. 주미공사관 폐쇄를 위한 ‘압박’이 시작된 것이었다. 외교공관으로서 주미공사관의 활동과 기능은 사실상 정지상태가 되었으며 관원들의 생활비 해결이 더 급한 상황이었다.
신태무는 1905년 6월 본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여비와 6개월분의 급여 등을 받지 못하다가 1000달러를 송금받고서야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신태무의 후임으로 서리 공사를 맡게 된 1등 참서관 김윤정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김윤정의 귀국 시기가 다가오자 그의 부인과 세 자녀가 함께 계속 미국 체류를 희망하며 주미일본공사와 미국 국무부 장관을 찾아가 미국 거주방안을 찾아달라고 호소까지 했다고 한다. 주미일본공사 다카하라가 본국 외무성에 김윤정의 미국 체류에 대해 건의한 내용은 그가 미국에서 친일 행적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청일전쟁 후 일본 교관에게 지도를 받은 사관생도였고, 일본 도움으로 임시서리공사에 승진한 점과 특히 김(윤정)이 일본 측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하고 일본외상의 훈령을 한국 황제의 명령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시행함으로써 황제로부터 5번이나 견책받은 사실 등을 들어 일본공사관에서 봉급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 워싱턴이 곤란할 경우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으로 채용하여 적절한 봉급을 받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이러한 일본공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체류 방법을 찾지 못하자 김윤정은 1906년 1월 29일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길에 오르기 전인 1905년 12월 30일자로 주미공사관이 보관하고 있던 기록과 문서, 관유재산 일체를 일본공사관에 인계한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매각 절차 및 금액
일본정부는 주미일본대사 아우키 슈조(靑木周藏)를 통해 방치됐던 주미공사관 매입희망자를 찾기 시작해 테일러(J. Augustus Taylor)로부터 ‘1만달러에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대한제국정부는 1891년 이 건물을 2만5000달러에 매입해 5000달러를 들여 수리까지 한 상황이라 헐값 매각에 난색을 표했지만 일본대사는 건물을 매입한 지 16년이 지났고 매입 당시에는 각국 외교공관들이 위치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중하층 흑인들이 거주하는 변두리 지역으로 1만달러는 괜찮은 가격이라며 매각 절차에 들어간다.
워싱턴특별행정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의 법규는 제3자 명의의 부동산매각을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었다. 주미공사관은 1891년 고종의 명의로 워싱턴DC 등기소에 등기된 개인재산이므로 일본대사가 이 건물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종으로부터 양도받아야 했다. 워싱턴DC법에 따른 양도 절차는 고종이 미국 영사(領事) 앞에서 2명의 증인 입회하에 이 재산(주미공사관)을 양도한다는 서류에 서명하고 양도를 승인해야 하며 이를 미국 영사가 공증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대한제국정부는 양도증서를 만들어 1910년 7월 4일 주미일본대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보낸다. 이 증서는 1910년 6월 29일 고종이 미국 서울총영사관 부총영사 골드(Ozro C. Gould) 임석 아래 궁내부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와 승재부총관(承宰府總管) 조민희 등 2명의 보증인 입회하에 작성, 서명날인하고 보증인이 부서(副署)했으며 이를 골드가 확인, 서명공증한 것이었다. 이 증서는 고종이 1891년 11월 28일 미국인 브라운(Sevellon A. Brown)에게서 매입한 주미공사관 건물과 토지를 주미일본대사에게 부동산과 5달러를 받고 양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미일본공사 우치다는 미국인 풀턴(Horace K. Fulton)과 정식으로 매매 절차를 끝내고 매각대금으로 1만달러를 받았다. 실수령액은 매매가의 3% 중개수수료를 제외한 9700달러였다. 또한 가재도구 등은 별도 경매를 통해 196달러22센트, 공사관 건물 관리비 가운데 남은 36달러를 합쳐 모두 9932달러22센트를 원(圓)화로 바꿔 1만9984원34전(당시 외환시세 100원에 49달러70전)을 일본 외무성으로 송금해 조선총독부에 인계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돈의 처리를 위해 주미일본공사 우치다에게 매도가격이 명시된 매도증서 1통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우치다는 “매도증서는 워싱턴DC의 부동산 대장(Deed)에 등재되어 있으나 이 증서에는 ‘가급적 매도가격 기입을 피하는’ 이곳의 관례에 따라 우치다-풀턴 간의 매매증서에도 ‘을(풀턴)이 갑(우치다)에게 지불한 10달러의 금액과 기타 유가의 약속을 감안, 갑은 을에게 토지 등을 양도한다’고 기재하고 있을 뿐, 매각대금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아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회신했다.
당시 워싱턴DC의 관례에 따라 고종이 주미공사관 건물과 부지 등을 일본대사에게 양도한 양도증서에는 5달러에 양도한다고 적었고, 일본대사가 풀턴에게 매도한 양도증서에는 10달러를 받고 매각한 것으로 기재한 것이다. 고종이 이 건물을 매입한 증서에도 5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기재됐다. 그러나 고종이 일본대사에게 양도할 때 실제 돈거래는 없었다.
2012년 10월 18일 잃었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문화재청에서 다시 매입했다. 그러나 주미공사관 관련 모든 연구자료 및 언론 기사 등에 일본에 의해 5달러에 강탈당하고, 이어 미국인 풀턴에게 10달러를 주고 팔았다는 등기부상의 기록만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면은 워싱턴DC 관례에 따랐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의 주미공사관 폐쇄와 공관원 철수, 강제 매각 등과는 다른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기를 제안한다.
■ 참고자료
1. 김원모, 《개화기 한미 교섭관계사》(2003)
2. 홍인근, <일본의 대한제국외교공관 폐쇄> 《국제 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9(2007) 일본의>
3. 홍인근, 《대한제국의 해외공관-일본외무성 기록》, 나남(2012)
4. 한종수,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44(2014)
5. 김원모, 『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上』 (2019.9.)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