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디자인 강국에서 찾은 삶을 디자인하는 배움
8년 전 교육기관 중심의 핀란드 연수를 다녀왔다면 이번은 교육이 어떤 사회망 안에서 작동되는지 그 기반을 살펴본 사회문화 탐방기 정도가 되겠다. 작년 여름 서이초 사건 이후 9.4 집회를 지나오면서 나뿐만 아니라 교사집단 내부에서도 ‘구조맹(構造盲)’에 대한 절감들이 있었으리라. 그간 교육은 경제논리나 정치논리에 포섭되지 말고 고고하게 지켜내야 할 ‘교육’만의 영역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그 인식이 순진한 환상 혹은 말의 차안대(遮眼帶 눈가면)였음을 깨닫는 즈음이었기에 더욱 의미있는 기행이었다.
핀란드 교육정책은 대타협의 산물
한국 교육계의 숱한 관계자가 다녀간 덕인지 현상적으로는 이미 참조되고 반영된 정책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수입된 정책들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굴절과 왜곡을 겪고 있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두 국가간 교육이 작동되는 회로에 차이가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핀란드의 경우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연합정치의 경험이 사회 전반에서 합의민주주의 문화를 조형한다. 노동과 자본 간에도 대화와 타협의 전통이 확보돼 있어 시장경제에서도 사뭇 다른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사회보험과 공공서비스를 결합한 보편적 복지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다. 결국 핀란드의 교육정책은 이러한 배경하에 사회정책이자 복지정책으로 고안된 대타협의 산물인 셈이다.
오디 도서관(Oodi Library)은 합의의 힘으로 그려내는 사회적 디자인 과정과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도서관 외에도 메이커 스페이스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는데 이 바탕에는 탄탄한 시민들의 참여적 아이디어가 있다. 핀란드 의회와 마주한 위치, 도서관 내부 구성과 배치도 더할 나위 없이 혁신적이지만 도서관을 찾는 시민들의 삶을 디자인한다는 측면에서 큰 울림을 준다.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도서관을 짓는 나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우리는 어떻게 흘려보냈나를 잠깐 생각했다.
마우눌라 하우스(Maunula House) 역시 주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의 합작품이다. 도서관과 시민교육센터, 청소년센터가 함께하는 장소인데 장장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의회와 시청, 지역 주민간 협의와 협력을 통해 완성했다. 우리의 행정이 늘 단기 예산집행의 시계에 묶여있는 걸 생각하면 놀랄 만한 속도감이다. 또한 주민참여형 행정 측면에서도 의견 수렴은 많아졌지만 결정 과정에서의 소외가 존재하는데, 핀란드는 전문 연구자들이 협상과 조정 과정을 매개한 실천적 층위가 인상적이었다.
데모스 헬싱키(Demos Helsinki)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비영리 씽크탱크로 다양한 분야의 정책 입안 기초가 되는 연구를 수행하고 정부나 기관에 지속 가능한 미래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리서치 및 컨설팅 기관이다. 미래적 상상력과 새로운 도전을 바탕으로 불평등이나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사회혁신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있었다. 최전선의 담론과 지평에서 공정, 지속가능, 행복 등의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경계와 한계를 지켜나가는 고집 또한 경이로웠다.
공감과 합의 경험으로 공동체 일궈
핀란드는 조합원수가 인구수를 훨씬 상회하는 협동조합의 나라이기도 하다. 펠레르보(pellervo)는 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는 협동조합중앙협회다. 일체의 정부 지원과 간섭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된다. 핀란드는 협동조합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해 온 역사적 경험이 있다. 지역 재생과 사회적 경제를 넘어 비즈니스 모델로서 현대적 인식을 다짐과 동시에 사회적 삶으로서의 관계를 여전히 고민한다. 농업을 비롯해 은행, 소매품 등 거의 모든 사업 부문에 협동조합이 존재하고 사회 복지와 공공서비스 문제까지 다룬다. 복지국가의 영역마저 제3섹터에서 일궈내는 모습을 보니 제도를 만들어내는 행위자 측면에서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복기하게 된다. 참고로 핀란드에서는 조합원 1명으로도 협동조합 설립이 가능하다. 다음 세대와 미래 구성원에게 여지를 두는 것이라 한다.
익히 알려진 핀란드식 사우나는 달구어진 돌에 물을 부어 정령처럼 이는 증기를 쐬는데 이를 핀란드어로 뢰일리라고 한다. 다소 영성과 예술성이 담긴 용어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물의 기화 현상조차 디자인 감각으로 승화해 내는구나 싶다가 문득 삶의 묘미를 이처럼 과정에 집중하고 온전히 즐기는 데서 찾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과 돌, 나무와 물. 서로 다른 사물의 온도가 공기와 빚어낸 절정으로서 증기를 나누어 마시듯 공감과 합의의 경험으로 함께 살아갈 세상을 그리고 만들어 온 듯하다.
그러고 보니 핀란드의 빼어난 디자인은 건축물과 예술품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의 제도적 시스템을 넘어 배움과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단편적 시선에서의 판단은 신중해야겠지만 오랜 세월의 결 동안 그들을 조각해 낸 북구의 온도와 사회의 속도감을 조금이나마 감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문화를 관통하는 힘을 무엇으로 파악할지, 그리고 그 안에서 교육은 혹은 배움은 어떤 위치와 의미로 존재해야 할지 다시금 고민이 깊어진다.
정유숙 세종 소담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