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납품단가 지원예산 70% 소진, 기재부 난감
윤 대통령 총선 직전 “무기한·무제한 투입” 약속
한은 총재도 “재정 쓴다고 가격 문제 해결될까”
정부부처 일각서도 ‘무제한 재정투입’ 회의론 ↑
정부가 과일 가격을 낮추기 위해 투입하는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 한 달 만에 소진되고 있다. 예산항목 중 납품단가 지원 예산은 이미 70%가 소진됐다. 기획재정부와 농림축산식품부는 현재 추가 예산 편성을 논의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달 초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 지원을 “무제한·무기한 연장하라”고 한 바 있다. 정부부처 일각에서는 ‘공급이 한정된 농산물 가격을 내리기 위해 재정을 무제한 쓰는 방식’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22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 농산물 납품단가 지원 예산 959억원 중 70%가 소진됐다. ‘납품단가 지원’ 예산은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단가를 보조해 도매가를 낮추는 데 쓰인다. 쿠폰 등을 통해 소비자 가격을 직접 낮추는 ‘할인 지원’과는 또 다른 방식이다. 같은 날 기준 할인지원 예산도 총 680억원 중 40%가량이 집행됐다.
정부가 농축산물 가격을 낮추는 데 재정을 투입하는 주된 이유는 물가상승률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지난 2일 통계청이 발표한 ‘3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94(2020=100)로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했다. 신선 식품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9.5% 올랐다. 특히 사과는 전년 동월 대비 88.2% 올랐다. 사과 물가 상승률은 1980년 1월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다.
그러자 정부는 지난달 15일 ‘물가 관련 긴급 현안 간담회’를 열고 1500억원 규모 ‘긴급 농축산물 가격안정자금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납품단가 지원(755억원) △할인지원 예산(450억원) △aT 과일직수입(100억원) △축산물자조금(195억원) 등에 총 1500억원을 투입했다. 남품단가 지원에만 마련한 재원의 절반 이상을 배정했다.
정부가 소비자의 실구매가를 낮추는 할인 쿠폰 발행에서 납품단가 지원으로 정책 무게중심을 옮긴 것은 판매가 자체를 낮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잡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유통업자가 대형마트 등에 1만원에 납품하던 사과에 정부가 납품단가 4000원을 지원하면, 유통업자가 6000원에 납품한다. 1만원에 납품받아 20%의 마진을 붙여 1만2000원에 팔던 마트는 6000원에 납품을 받아 1200원(마진율 20%)을 붙여 7200원에 판매할 것이란 게 정부 구상이다.
실제 납품단가 지원으로 시중에서 판매되는 사과 가격이 다소 내려가긴 했다.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4월 중순 기준 후지 사과 10개 가격은 2만4262원으로 한 달 전 가격(2만7120원) 대비 10.5% 내렸다.
하지만 납품단가 지원액만큼 가격이 내리지는 않았다. 사과 10개는 통상 2kg이다. 정부의 사과 납품단가 지원금은 1kg당 4000원이다. 2kg면 8000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실제로 내려간 가격은 3000원 남짓이다. 5000원은 증발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정부 지원금으로 가격을 내리면서 시장에서 수요가 늘어나 후속적인 가격 상승을 유발했거나, 지원금의 일부가 중간 납품업자들의 차익 증가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기재부와 농식품부는 5~6월에도 대통령 발언 기조에 맞춰 재정을 투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가 제한을 두지 않고 재정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기자간담회에서 “농산물 가격이 오르는 것은 기후변화로 작황이 변화한 게 주요 요인인데 계속 재정을 쓴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농산물 물가 상승은)통화 및 재정 정책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며 “기후변화로 인한 작황이 재배면적을 더 늘리고, 재정을 쓴다고 해결될까”라고 반문했다. 이 총재는 재정정책 외에 사과 등 과일 수입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회의론이 적지 않다. 기재부 한 관계자는 “공급에 문제가 생겨 시장에서 가격이 올라가는 상황인데, 재정으로만 이를 메꾸는 것은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미 대통령이 국민에게 공언한 약속이니 예산 추가투입은 불가피하겠지만, 허심탄회하게 이 문제를 재론할 때가 됐다”고 했다.
성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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