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두께를 모르는 금속 파이프는 얼마나 강할까
1988년에 상계동 아파트 신축현장 안전점검을 다녀왔다. 안전모를 쓰지 않고 일하는 근로자가 눈에 띄어 동행하던 현장 직원에게 지급했는지 물었다. 현장 직원이 그 근로자를 불러 안전모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근로자는 못을 담아두었던 안전모를 들고 와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바닥에 내던졌다. “여기 밖에 먹고 살 데가 없는 줄 아냐”며 연장을 챙겨서 현장에서 나갔다.
당시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 초기의 기능공 부족 때문에 임금이 폭등하면서 망치질을 할 줄 알면 목공으로 일할 수 있었던 시기의 건설현장 풍경이었다. 당시 근로자들에게 보호구는 어색하고 초보자 티를 내는 물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은 1990년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전면 개정 시에 현장의 안전·보건 조치의 강제성과 구체성을 확대할 의도로 시행규칙에서 분리 제정됐다. 이후 47차에 걸친 개정을 통해 현재 673개 조, 수천개 호에 이르는 방대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설정돼있다. 제정 당시 산업현장의 낮은 안전의식, 안전 관련 경험과 정보부족 상태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조치였다.
그러나 현재의 안전의식, 산업재해율, 생산 및 시공 환경은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 현장의 안전 조치 위반이 정보부족의 문제는 아니다. 이제 안전규칙은 법규의 속성인 경직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산재예방 효능을 잠식한 상태에서 규제 행정을 위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직업병 예방 기준, 보건규칙
보건규칙은 주로 직업병 예방을 위한 기준이다. 직업병은 그 발생 기제와 속성이 사고성 재해와는 다르다. 직업병 문제는 1980년대 말 원진레이온 사태가 분수령이 됐다. 당시 직업병의 발생 원인과 기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정보가 현저히 부족했다. 국내 최악의 산업재해로 기록된 원진레이온 사태를 계기로 산안법이 전면 개정됨에 따라 상당 수준의 정보가 확충돼왔다. 정보의 신뢰도를 더 높여가야 하지만 2015년에 세계 5번째로 만성흡입독성 실험설비까지 갖춘 상황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감지되지 않는 화학물질에 의한 직업병은 과거에는 주로 예측불가의 영역이었으나 그간의 선진 정보 확보와 국내 조사·연구를 통해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한 영역을 들어왔다. 직업병의 원인으로 밝혀진 화학 물질의 농도와 노출기준 등을 강제적 기준으로 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2003년 대폭 추가된 안전규칙
2003년 안전규칙 전면 개정 시에 구체적 기준들이 대폭 추가됐다. 안전난간은 추락방지 목적의 대표적인 안전시설이다. ‘난간대는 지름 27mm 이상의 금속제파이프나 그 이상의 강도를 가진 재료일 것’이라는 추가 기준이 있다. 지름을 27mm로 정한 연유도 분명치 않을 뿐더러, 파이프의 두께와 금속의 종류도 누락돼, 문장 후반에 있는 ‘그 이상의 강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발끝막이판(Toe Board)은 작업발판 끝 부분에 자재나 공구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높이 10Cm의 판재다. 해당 기준에 발끝막이판을 생략해도 되는 단서로 ‘날아올 위험이 없거나’라는 생뚱맞은 조건이 있다. 사고의 유형분류에 쓰이던 ‘낙하·비래’에 있는 ‘비래’를 말단 실무자가 성실히 옮겨 놓은 실수로 추측된다. 현장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잠깐이라도 눈 여겨 봤다면 삭제했을 문구다.
안전규칙에 그런 오류들이 상당수 있고 더욱이 20년 이상의 수십 차례에 걸친 제·개정에서 조차 그런 오류들이 걸러지지 않았다. 게다가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 수준에서 열거된 사례들과 계획서들 역시 해석과 재량권 문제로 사고예방에 도움은커녕 혼란과 낭비를 조장하고 있다.
기본적인 안전조치 의무를 규제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다양하고 변화하는 현장의 모든 상황에 적합한 구체적인 강제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강제 기준의 구체화가 규제 행정에는 편하겠지만, 강제 기준의 경직성은 현장 적용성을 떨어뜨려 불필요한 낭비를 조장하고 기술발전을 방해한다.
따라서 강제 기준은 자주 발생되는 위험의 제거 또는 축소를 위한 기본적인 조치의 취지 역할과 기능 정도의 내용으로 정하고, 소재 크기 형태 구조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한다. 현장의 구체적 조치에 필요한 사례와 기술 정보는 KOSHA-GUIDE(안전보건기술지침) 등의 참고자료를 충실히 제공하면 된다.
스위스 치즈 모델의 제임스 리즌(James T. Reason)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안전규칙에 과잉 의존을 산업재해 유발요인으로 말하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