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금융당국, 강한 반발에도 ‘조사받는 기업명 공개’ 강화 추진

2024-05-13 13:00:01 게재

‘조사·제재 투명성 강화’ 목적 … ‘무죄추정 원칙 반해’ 반발 여론

재무장관까지 나서서 반대 … FCA 청장 “아직 결론 안 내려”

영국 금융감독청(FCA·사진)이 업계와 정부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사 중인 사건의 기업명을 공개하는 ‘Name and Shame(조사 사항 대외공개)’ 강화를 추진하고 있어 최종 결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9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애슐리 앨더(Ashley Alder) FCA 청장은 8일이 ‘Name and Shame’을 어떻게 이행할지에 대해 “아무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이번 정책 추진에 대한 거센 비판에 감독기관이 상당히 놀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FCA는 4월말까지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는 하원 재무위원회에서 “사실 우리는 이번 방안을 발표할 당시 업계의 심각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유효하고 적합하다”며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명했다.

FCA는 올해 2월 ‘제재 효율성·투명성 강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금융시스템의 신뢰성 등 공공의 이익 관점에서 필요성 여부를 판단해 조사 착수, 중간 상황, 조사 종결 등에 대한 대외 공개를 보다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개인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공표하기로 했다.

FCA는 현재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조사 내용을 대외 공개하고 있다. 또 전략적 감독목표에 부합하고 제재의 효과가 큰 사안들에 제재를 집중하고 제재할 만한 사항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 신속히 종료하기로 했다.

FCA는 이번 방안이 의회의 조사·제재 투명성 강화 요구, 다른 규제당국의 사례도 참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조사 결과 확정 전 대상 회사 공개는 무죄 추정 원칙에 반하고 평판과 금전상의 상당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업계 및 영국 전체의 경쟁력과 신뢰 저하가 예상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 FCA 조사기간이 평균 4년 가량 걸리고 조치 없이 종료되는 경우도 약 65%에 달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FT는 “FCA가 영국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규제를 너무 자주 하고 있고, 즉시 멈춰야 한다”는 정부 고위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달 1일에는 제레미 헌트(Jeremy Hunt) 영국 재무장관이 FCA의 ‘Name and Shame’ 강화 정책을 공개 경고하면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헌트 장관은 FT와의 인터뷰에서 “FCA가 조사 중인 회사의 실명을 ‘더 빨리, 더 자주’ 공개하려는 정책을 재검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금융서비스시장법(FSMA) 개정으로 FCA는 ‘성장 고려’의 의무를 부여받았지만 현재 추진 중인 정책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성장을 촉진하는 방식은 부문별로 다를 수 있으므로 일부 부문에서는 ‘Name and Shame’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으나, 금융부문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Name and Shame’이 자본시장 활성화 및 투자 유도 등 경제성장 촉진 노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금융회사의 경쟁력 저하 우려 등 업계 반발이 이어짐에 따라 정부를 대표해 헌트 장관이 반대 목소리를 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재무장관이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감독기구의 정책 추진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영국은 정부 정책에 금융감독이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독 기능을 독립적으로 분리했다. 금융산업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강력한 규제 완화 정책으로 감독규제가 느슨해질 경우 위기 상황에서 금융감독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영국 재무부는 지난 2022년 금융서비스시장법(FSMA) 개정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시 감독당국의 결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조항 추가를 검토했지만 건전성감독청(PRA)과 FCA 반대에 부딪혀 철회했다.

일각에서는 재무부의 PRA·FCA에 대한 직접적 지시·개입 권한, 성장·경쟁력을 위한 FSMA 개정에 따른 의무 부여 등 지난해 촉발됐던 감독기구 독립성 관련 기관 간 갈등이 다시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정부기관인 금융위원회가 금융산업정책과 감독정책을 동시에 수행하고, 민간기구로 출범한 금융감독원은 금융감독에 대한 집행기구로 금융위의 사실상 하위 조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 정책으로부터 금융감독의 독립성이 유지된다고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영국의 ‘Name and Shame’ 강화 정책이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정부와 업계의 반발에 부딪힐 것으로 보여 실현 가능성은 낮을 전망이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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