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자전거래’ KB·하나증권 먼저 제재…나머지 7곳도 징계 수순
적발·제재에도 근절 안 되고 반복
유동성 위기와 맞물리면 사태 커져
중징계 가능성, 일부 CEO도 대상
금융당국이 증권업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한 ‘불법 자전거래’와 관련해 위법행위가 드러난 증권사 9곳에 대한 본격적인 제재에 나선다. 지난해 가장 먼저 검사를 받은 KB증권과 하나증권이 제재 심판대에 올랐다.
금융감독원은 21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KB·하나증권에 대한 기관제재와 임직원 제재 안건을 상정하기로 했다. 금감원 검사에서는 KB·하나증권 이외에도 미래에셋·한국투자·NH·교보·유안타·유진·SK 등 7개 증권사가 적발됐다.
금감원 관계자는 “위법행위 유형이 유사해서 KB·하나증권에 대한 제재 판단이 나오면 다른 증권사들에 대해서도 제재 논의와 결정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감원은 검사를 통해 증권사들이 운용해온 채권형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에서 고객 계좌의 손실을 불법 자전거래를 통해 다른 고객의 계좌로 전가하거나, 고객의 투자손실을 증권사 고유자산을 통해 보전해주는 등 중대 위법 사실을 발견했다.
채권형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1대1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대표적인 금융상품이다. 다수의 고객자산을 집합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목적과 자금수요를 고려해 단독 운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인고객들의 단기자금 운용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 검사에서 일부 운용역이 만기도래 계좌의 목표수익률 달성을 위해 불법 자전거래(연계·교체거래)를 통해 고객계좌 간 손익을 이전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특정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다른 투자자에게 손실을 전가한 것으로 업무상 배임혐의를 받고 있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 운용역 30명 가량의 혐의를 수사당국에 제공했다.
또 증권사 고유자산을 활용해 고객 랩·신탁에 편입된 기업어음(CP) 등을 고가 매입해 원금 및 제시 수익률을 보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도 고객과의 계약조건 위배, 동일 투자자 계좌간 자전거래, OEM펀드 운용 등의 위법행위가 금감원 검사에서 적발됐다.
증권사의 자전거래는 고객에 대한 배임혐의 뿐만 아니라 시장 전반의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을 때 편입 자산의 만기불일치(미스매칭) 문제로 증권사의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난 2022년 9월 레고랜드 사태 당시 자금시장 경색으로 고객들의 환매 요구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유동성 위기는 증권업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더 이상 고객 계좌간 연계·교체거래 등 방식만으로는 환매시 수익률을 보장해줄 수 없게 되면서 일부 증권사는 회사의 고유자금을 활용해 환매대금을 마련해 지급하기도 했다. 금감원은 “일부 증권사의 경우 2022년 10월부터 지난해 5월 중 수조원 규모의 채권형 랩·신탁 환매대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고유자산에서 수백억원 규모의 평가손실이 발생했다”며 “랩·신탁 운용 시 편입자산의 만기 불일치 및 시장 상황 등을 충분히 고려해 리스크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증권업계에서 이 같은 불법 자전거래가 이번에 처음 적발된 것은 아니다. 지난 2016년 현대증권을 비롯해 교보·대우·미래에셋·한화투자·NH투자 등 6개 증권사가 같은 혐의로 제재를 받았다. 현대증권은 랩어카운트 부문 1개월 영업정지와 과태료, 교보증권은 기관경고와 과태료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임직원 64명에 대해서도 면직부터 주의까지 징계 조치가 내려졌다.
금융당국은 앞으로 증권업계에서 더 이상 불법 자전거래가 재발하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엄단하겠다는 방침이다. 따라서 증권사에 대한 일부 업무 영업정지와 임직원들에 대한 무더기 중징계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불법 자전거래 당시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승진을 통해 증권사 최고경영자(CEO)에 임명된 경우 감독책임자로 중징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모 증권사의 감사를 맡았던 금융권 인사는 “내부적으로 불법 자전거래를 적발해 엄단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이 같은 일이 또 벌어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