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반도체는 왜 반도체일까

2024-05-28 13:00:04 게재

현대 문명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반도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깨어있는 거의 항상 손에 든 스마트폰, 업무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컴퓨터, 여유시간의 상당 부분을 잡아먹는 TV 뿐만 아니라 밤에도 스마트워치와 함께 잠을 잔다.

사실 ‘반도체’라는 용어는 특정한 물질을 지칭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전자소자를 의미할 때도 있으며, 산업의 한 섹터를 나타내기도 한다. 정보혁명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를 가능하게 해 주는 모든 것이 반도체 소자에서 나오므로 현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잇는 반도체 시대라고 해야 할 정도다. 반도체는 뭐가 특별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일까?

물질이 전기를 얼마나 잘 흘리는가의 척도를 ‘전기 전도도’라 한다. 구리나 은과 같은 물질은 전기 전도도 값이 매우 크다. 구리보다는 수십배 작지만 여전히 좋은 전도체인 스텐레스 스틸이 있다. 부도체 중에도 절대로 전기를 흘리지 않는 석영같은 물질이 있는가하면 아주 약간은 전기를 흘리는 물질도 있다. 은과 석영의 전기 전도 차이는 무려 10^24배나 되는데 쉽게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 중에서 물질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없다.

그런데 전기 전도도로 볼 때 전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쯤에 있는 ‘반’만 전도체인 물질을 반도체라 한다. 전기를 어중간하게 흘려주는, 경계에 있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양자역학 완성 후에야 세상에 빛 봐

어떤 물질이 전도체 혹은 반도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20세기 초 양자역학이 완성된 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전기를 흘려주는 것은 전자인데 양자역학이 있어야만 전자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사람인 하이젠베르크의 첫 제자인 블로흐(Felix Bloch)는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crystal)고체의 원자와 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규정하는 블로흐 정리를 증명했다. 이를 이용하면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기만 하면 미시세계의 원자 하나에서 확립된 양자역학을 사용해서 거시 물질의 성질을 알아낼 수 있다.

블로흐의 정리를 적용해 물질 속 전자 에너지 밴드구조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매우 복잡한 계산이라 수퍼컴퓨터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계산 결과 전자가 가질 수 없는 에너지값 영역인 밴드갭(band gap)이 있으면 부도체가 되고 이런 영역이 없으면 전도체가 된다.

밴드갭의 크기는 부도체 물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밴드갭이 아주 작으면 상온에서 전자가 열에너지를 얻어 밴드갭을 건너뛸 수 있고 이들이 약간 전류를 흘릴 수 있어 반도체가 된다. 따라서 반도체는 온도가 높아질수록 전기를 잘 통한다. 반도체의 특성을 최초로 관찰한 패러데이가 측정한 것이 바로 온도에 따른 전기 전도도 변화다.

그럼 반도체는 왜 현대 문명의 근간이 되는 전자소자를 구성하는 물질이 되었을까? 이는 트랜지스터 같은 전자소자가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전자소자는 전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트랜지스터는 외부 연결선이 보통 세개 있는데, 이중 두개에 걸어주는 전압이나 전류를 바꾸면 세번째 선의 전류를 끄고 켤 수 있다. 기계적 전기 스위치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컴퓨터 CPU 같은 현대의 디지털 소자는 많게는 수백억개의 이런 반도체 스위치를 연결하여 논리 연산을 하는 것이다.

반도체 스위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질의 전기 전도도를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전기가 잘 흐르는 전도체는 전도도를 많이 낮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강력한 부도체도 전도도를 높이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반도체는 불순물을 미량 첨가하면 전기 전도도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대표적인 반도체 실리콘은 대략 원자 100만개당 불순물을 하나씩 넣으며 전기 전도도가 거의 100만배 증가하고 10만개당 하나씩 넣으면 1000만배 증가한다.

불순물 넣어 전기 잘 흐르게 하는 원리 이용

원하는 만큼 전기 전도도가 달라진 불순물 섞인 반도체를 붙여서 접합을 만들면 트랜지스터와 같은 스위치 소자가 만들어진다. 금속 같은 전도체나 석영 같은 부도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석영만큼은 아니라도 밴드갭이 상당히 커서 상온에서 거의 완전히 부도체인 물질도 경우에 따라 적절히 불순물을 넣어주면 전기를 잘 흘리는 것이 있다. 이들은 ‘밴드갭이 큰 반도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LED 전구에서 빛을 내는 질화갈륨이다.

반도체가 현대 전자문명의 기본 물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불순물을 섞어서 전기 전도도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물질과 불순물이 협업한 결과다.

박용섭

경희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