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사건 ‘윗선’ 수사 속도 낼까
특검법 부결로 어깨 무거워진 공수처
윤 대통령, 사건 이첩날 이종섭과 통화
“오직 증거와 법리에 따라 계속 수사”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법(채상병 특검법)’이 28일 열린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최종 부결되면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관심이 모아진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안인 만큼 공수처로서는 모두가 납득할만한 수사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특히 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외압에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관여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공수처가 사안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해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항명 혐의 등을 재판 중인 군사법원이 최근 통신사로부터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의 통신기록을 조회한 결과 윤 대통령이 지난해 8월 2일 이 전 장관과 세 차례 통화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날은 채 상병 순직사건과 관련해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의 과실치사 혐의를 담은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자료가 경찰에 이첩됐다가 회수된 날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경찰에 자료가 이첩된 직후인 12시 7분 개인 휴대전화로 이 전 장관과 4분 5초간 통화했다. 이어 12시 43분과 12시 57분에도 전화를 걸어 각각 13분43초, 52초간 통화했다. 윤 대통령은 또 이 전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결과를 국방부 조사본부에 재검토 결정을 내리기 하루 전인 8월 8일 아침 7시 55분에도 전화를 걸어 33초간 통화했다.
공수처가 수사외압 의혹의 시작점으로 지목된 이른바 ‘VIP 격노설’ 관련 증언과 물증을 확보한 데 이어 윤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통화 사실까지 드러난 것이다.
박 전 단장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며 대통령의 격노가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외압에 나선 배경이라 주장해 왔는데 공수처는 또 다른 해병대 고위간부를 조사하면서 김 사령관으로부터 VIP격노설을 들었다는 취지의 추가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 사령관 휴대폰 포렌식 과정에서 VIP 격노설을 언급한 내용의 녹음파일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공수처가 수사 외압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선 이 전 장관뿐 아니라 대통령실과 윤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해병대와 국방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공수처는 아직까지 윗선에 대한 수사는 본격화하지 않고 있다.
공수처 관계자는 김 사령관과 박 전 단장을 한 번 더 소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지만 이 전 장관에 대해선 소환 일정을 조율하거나 본격적인 조사 단계에 접어든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수사기록 이첩·회수 당일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과 통화한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 등 대통령실 관계자 수사에 대해서도 “사실관계를 보다 촘촘히 구성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아직 그 부분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공수처는 우선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자료 이첩과 회수 과정, 국방부 조사본부의 재이첩 과정 등에서의 외압의 사실관계를 철저히 규명한 뒤 윗선으로 수사를 확대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특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으로 얼마나 속도감 있게 수사를 진행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야권이 22대 국회에서 특검법을 다시 발의하기로 한 것도 변수다. 특검법이 통과되면 공수처는 수사기록 제출 등 특검 요청에 따라야 한다. 공수처가 계속 수사해도 판·검사와 경무관급 이상 경찰공무원만 기소할 수 있어 검찰로 넘겨야 한다는 점도 공수처 수사의 한계로 지적된다.
공수처는 국회에서 특검법이 부결된 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오직 증거와 법리에 따라 법과 원칙대로 계속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통화와 관련해 “윤 대통령도 생존자 구출이 아닌 사망자 수색에서 무리한 작전을 펴지 말라 하셨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통화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군이 수사 주체가 아닌데 장관과의 통화를 수사외압으로 보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덧붙였다.
구본홍 이재걸 기자 bhkoo@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