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없었다”→“지시와 무관”
미묘하게 달라지는 이종섭 입장
‘VIP격노설’에도 “접한 적 없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외압 의혹 관련 정황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입장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 장관은 사건 초기 제기된 의혹 자체를 강하게 부인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법리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거나 자신과의 연관성에 선을 긋는 모습이다.
이 전 장관의 변호인 김재훈 변호사는 29일 입장문을 내고 “국방부 장관의 대통령, 대통령실 관계자,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과의 통화를 이상한 시각으로 보면 곤란하다”며 “이 전 장관의 통화 기록 중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부분은 결단코 없다”고 밝혔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항명 혐의 등을 재판 중인 법원이 최근 통신사에 통신기록을 조회한 결과 채 상병 사망사건 이후 이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통화한 내용이 드러나자 통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공개된 통화기록에 따르면 이 전 장관은 지난해 8월 2일 낮 12시 7분과 12시 43분, 12시 57분 등 3차례에 걸쳐 윤 대통령과 통화했다. 통화시간은 모두 합쳐 총 18분 40초에 달한다. 이날은 채 상병 순직사건과 관련해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의 과실치사 혐의를 담은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자료가 경찰에 이첩됐다가 회수된 날이다. 박 전 단장은 같은 날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보직해임을 통보받았다.
이 전 장관은 8월 2일을 전후로 김 경호처장을 비롯한 대통령실 관계자, 정부 고위관계자들과도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이 전 장관이 국회 등에서 밝혀왔던 것과는 배치된다. 앞서 이 전 장관은 지난해 8월 2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대통령실로부터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문자를 받거나 메일을 받은 게 없냐’는 질문에 “문자나 전화를 받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통화 사실이 드러나자 이 전 장관측은 언론을 통해 해당 발언은 통화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혐의자에서 사단장을 제외하라는 통화는 없었다’는 취지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변호사가 배포한 입장문에서도 “관련해 제기되는 의혹들은 모두 사실무근”이라며 “대통령과 장관의 통화 기록은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수사 지시나 인사조치 검토 지시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증거를 통해 드러난 통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방어선을 그은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른바 ‘VIP격노설’과 관련해서도 이 전 장관은 미묘한 입장 변화를 드러낸 바 있다. 이 전 장관은 지난해 9월 4일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 “대통령 격노라든지, 혐의자를 제외하라고 외압을 했다든지 이런 것은 전부 사실이 아니고 (박 전 단장의) 변호인측에서 허위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공수처가 박 전 단장 외에 다른 해병대 간부로부터 ‘김 사령관에게 격노설을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김 사령관 휴대전화에서 격노설을 언급한 녹음파일을 복원하는 등 격노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오자 이 전 장관은 “대통령의 격노를 접한 사실이 없다”고 미묘하게 말을 바꿨다. 격노설 자체를 부인했던 예전과 달리 자신이 접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 전 장관측은 “만약 대통령실의 외압이 있었다 하더라도 장관은 의무 없는 일을 억지로 한 피해자일 뿐인데 왜 피고발인이 돼야 하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