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러시아 본토 공격 레드라인 넘나
“바이든, 공격 일부 허용”
러, 촉각 곤두세우며 경고
미국과 서방이 3년이 넘는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지켜오던 러시아 본토 공격 금지라는 레드라인을 넘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미국에서는 바이든이 일부 공격을 허용했다는 언론보도까지 나왔다.
러시아는 이 같은 서방의 움직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비례대응’을 경고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 AP 통신 등 미국 언론은 30일(현지시간) 복수의 당국자를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은밀히 미국이 제공한 무기를 사용해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도록 일부 허용했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를 방어하는 목적에 한해 미국 무기를 사용해 러시아 영토를 반격하는 것을 허가했다는 내용이다.
한 당국자는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하르키우에서 반격 목적으로 미국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팀에 지시했다”며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군에 충분한 반격을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러시아 본토 공격에 미국 무기 사용을 전면 금지했던 바이든 행정부의 원칙에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큰 변화라고 언론들은 평가했다.
이번 방침 변경은 러시아가 최근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 국경도시 하르키우까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내려졌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의 주요 동맹들은 이미 서방이 지원한 무기를 이용해 러시아 본토에 반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며 미국이 이를 허용할 것을 압박해왔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군은 로켓 등을 쏘아 하르키우로 향하는 러시아의 미사일을 요격하거나, 국경 인근에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향해 폭탄을 발사하는 러시아 폭격기를 공격할 수 있게 됐다고 미국 언론들은 평가했다.
다만 제한사항은 있다. 우크라이나가 이러한 무기를 이용해 러시아의 민간 인프라를 공격하거나 장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러시아 영토 깊숙이 있는 내부 군사 목표를 공격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전날 몰도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본토 타격 허용과 관련 “조건과 전장 상황, 러시아가 침략을 추구하는 방식이 바뀜에 따라 우리는 적응하고 조정해 왔다”며 수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날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도 “전장의 조건이 진화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리의 지원도 적절하게 진화해왔다”며 허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서방 무기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도록 허용할지를 두고 서방이 연일 격론을 벌이고 있다.
같은 날 나토는 체코 프라하에서 비공식 외무장관 회의를 열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무기의 사용제한을 해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dpa·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에서 “동맹국들이 무기 사용에 일부 제한을 걸었고 이는 각국의 결정”이라면서도 “전쟁의 전개 과정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도록 사용 제한을 일부 재고할 때가 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와 공식 행사 등을 통해 연일 규제 완화를 주장했고, 영국·프랑스·네덜란드·노르웨이 등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미국까지 가세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확전을 우려하는 반대 목소리도 만만찮다.
러시아에 우호적인 헝가리의 씨야트로 페테르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반격할 것이고 탄약이 충분하기 때문에 미친 생각”이라며 “호전적 정서가 (나토 회의가 열리는) 프라하에서 정점을 찍을 것이다. 이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본토 공격보다 방공망을 강화하는 게 낫다”며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되는 것을 막고 우크라이나의 민간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서방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연일 경고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긴장을 고조시키는 길을 택한 나라들의 이익에 궁극적으로 몹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콘스탄틴 가브릴로프 빈 주재 유럽안보협력기구 대사는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며 서방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할 경우에도 러시아는 핵무기를 사용할 권한이 있다고 경고했다고 타스통신이 전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30일 브리핑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말했듯이 러시아의 안보는 우크라이나에 완충지대를 조성함으로써 보장될 것”이라며 서방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시 ‘비례적인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 특히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최근 며칠, 몇 주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면서 “이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후과를 치를 것이며 궁극적으로 악화의 길을 택한 국가들의 이익에 매우 해로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